Q. 조운은 어째서 삼국지에서 가장 인기많은 장수가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운이 가장 인정받는 부분은 용맹과 충성심. 멀리 갈 것도 없이 정사를 편찬한 진수의 평가가 충직하고 용맹했다는 것이다. 별전까지 보면 일신의 무력뿐만 아니라 공성계를 써서 조조군을 격퇴시키는 등 전술적 임기응변도 갖춘 용장이었다. 일신시담(一身是膽), 언기식고(偃旗息鼓) 등의 고사성어가 이 조운별전의 공성계 일화에서 유래했다.단순히 무력만 뛰어난 맹장이 아니라 정치적 식견과 판단력도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관우의 죽음에 분노해 오나라를 치려던 유비를 말리거나 피폐해진 백성들의 땅을 장수들에게 나눠주자는 의견을 반대하고 나섰던 것을 보면 대국적인 안목도 출중한 장수였다. 이러한 강직한 성품 덕분에 유비는 그를 항상 측근으로 두고 신뢰했으며, 진수는 조운을 평할 때 '유비의 조아(爪牙)'라고 칭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당대와 후대를 가리지 않고 능력과 인격의 평가가 모두 높은 덕장으로서 후대에는 제갈량, 관우와 함께 역대제왕묘에 공신 자격으로 배향되었고 당대에는 진수의 평가와 계한보신찬의 평가만 보아도 진수는 용맹함에 중점을, 계한보신찬에서는 조운의 성정과 후덕함에 중점을 두며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유비는 조운의 용맹함을 고평가해 '일신시담'이라며 감탄했고, 촉 진영에서도 조운에 대해 호랑이 같은 위세를 가졌다고 평가했다.관우, 장비, 위연 같은 촉나라의 손꼽히는 명장들도 인물됨과 성격의 흠을 두고 크게 비판했던 진수가 조운과 황충만은 한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자 개국공신이었던 관영과 하후영에 빗대어 일말의 비난도 없이 매우 후하게 평가했던 걸 보면 인품이 무척이나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촉의 신하인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도 조운은 성정이 후덕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무장임에도 인격과 성품이 빛나는 케이스. 즉, 조운은 장수의 기본 덕목인 용맹과 냉철함을 겸비한 용장임과 동시에 그 외의 분야에서도 흠잡을 곳 없는 인품과 능력을 가진 인물이란 소리다. 이는 자기관리가 매우 철저하단 뜻이기도 하며 곧은 인간성까지 겸비하여 당대의 뛰어난 인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임관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유비나 제갈량 같은 실세 곁에서 최측근으로 있었던 만큼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음에도 당대의 평가, 후대 사람인 진수의 견해, 사서에 보이는 행적 모두 조운의 인간성에 대한 지적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인격과 성품, 공정함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높다. 그만큼 조운은 삼가고 겸손하며 공정하고 올곧은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Q.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없어진 계기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국은 1807년에는 노예무역을, 1833년에는 노예제를 폐지하였다. 이것은 미국보다 약 30년 앞선 일이다. 노예제 폐지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발달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대서양노예무역은 중상주의를 배경으로 한다. 유럽의 강국들이 각국의 재정을 풍부히 하기 위해서 무한경쟁하는 그 원리 속에 노예제와 노예무역이 성립했다. 노예와 관련해서 후발국가였던 영국은 1660년 왕립아프리카회사를 세우고 노예무역에 관한 독점적 거래권을 부여한다. 그런데 1688년의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을 거치면서 군주의 권한은 약화되고, 의회의 지위가 향상된다. 군주의 대권에 기초한 무역독점권은 의회법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원에 의해 불법으로 선언된다. 이와 동시에 아프리카회사는 의회에 독점무역을 승인하는 입법권을 청원한 반면, 이제까지 불법시된 자유무역상인들은 이를 저지하는 청원을 의회에 제기한다. 이렇게 의회는 독점무역이냐 자유무역이냐에 관한 논쟁의 중심이 된다. 많은 시민들을 기초로 하는 의회는 당연히 자유무역 쪽으로 기울게 되고 독점무역은 종료하게 된다. 그리고 18세기 자유무역과 함께 영국의 노예무역은 전성기를 맞는다. 이 기간 중에 도덕에 입각한 노예제 반대의 목소리는 파묻혀 있었다. 미국의 독립혁명과 함께 영국에서 잠복하고 있던 노예반대운동이 점화되었다. 미국의 독립선언이 담고 있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같은 인권선언을 기초로 식민지에서 주권국가로 독립했다는 것 자체가 노예에서 자유로의 이행을 상징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로 대두되면서 노예제가 반시대적 유물이라는 것이 폭로되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노예제를 일시 철폐한 것과 아이티가 최초의 흑인 공화국으로 독립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시대변화를 배경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선진국으로 자부했던 영국에서 노예폐지운동이 본격화된다. 이 기간 퀘이커 등 교회들, 시민들, 교수, 문인, 일반시민, 여성, 아이, 그리고 노예였던 흑인들까지 포함하는 범국민적 노예반대의 의식과 정서가 형성된다. 자유주의가 입헌주의와 인권선언에까지 도달하기 시작한 이런 대중의 열망을 반영해서 의회도 마침내 1807년 노예무역을 폐지하고, 1833년에는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도 자메이카의 노예해방운동의 조짐과 1832년의 선거권 확대를 통한 보통선거의 진전이라는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발달이 개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Q. 아프리카 대륙에 각 나라들의 경계선이 직선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아프리카 회의’ 혹은 ‘콩고 회의’로도 불리우는 ‘베를린 회의’는 콩고 강 어귀에 대한 특별 지배권을 주장하는 포르투갈의 제안으로 개최되었다. 독일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의 주재로 1884년 11월15일부터 1885년 2월26일까지 열렸다. 이 회의에 참석한 국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노르웨이, 터키, 그리고 미국 등 총 14개국이었다. 14개국 중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고 포르투갈은 이 회의 주요국으로 당시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전의 이해 당사자였다. 이 회의는 아프리카인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유럽 열강간의 충돌을 줄이고 아프리카 식민화에 대한 규칙을 논하는 자리가 되었다. 베를린 회의에서 포르투갈의 콩고강 유역에 대한 포르투갈의 영유권 주장이 거부되면서 벨기에 레오폴 2세(1835-1909)의 개인 식민지인 ‘콩고 자유국’이 탄생하게 됐다.베를린 회의가 개최될 시기까지 아프리카의 80%는 그들 전통에 의해 자치적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직 아프리카 해안 지역만 유럽에 의해 식민지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 회의로 유럽 제국열강들은 아프리카 내륙 통제권을 손에 넣기 위해 다투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에 의해 결정된 문화, 언어, 종교, 정치적 경계에 대한 고려 없이 기하학적 경계선에 대해 협상을 했다.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지리학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전통적 정치 분할에 대한 이해 없이 경계선을 그은 것이 현재의 아프리카의 국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