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경국전이 무엇에 대해 다루는 책인가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경국전은 1394년(태조 3년) 음력 3월에 정도전이 저술한 조선 왕조의 건국이념과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기본 방향을 설정한 헌장 법전입니다. 조선경국전은 총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마다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요.이 조선경국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주례(周禮)]의 6전체제를 모범으로 삼았으나, 조선의 실정에 맞게 조정되었습니다. 이 6전체제는 치국(治國)의 대략적인 원칙을 서론으로 하여 정보위, 국호, 정국본, 세계, 교서를 다루고 있습니다.서론에서는 천지자연의 이치에 따라 인(仁)으로써 왕위를 지켜나갈 것,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계승이라는 것, 왕위 계승은 장자(長者)나 현자(賢者)로 해야 한다는 것, 교서는 문신의 힘을 빌려 높은 수준으로 제작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언급했습니다.이어지는 본론에서는 치전, 부전, 예전, 정전, 헌전, 공전 등 6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전은 주요 소관업무를 소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치전에서는 군신(君臣)의 역할과 관리 선발 방법을 강조하였으며, 재상(宰相)의 중요성과 관리 선발의 고시제도에 의거한 능력 본위의 선발을 강조했습니다. 부전에서는 국가의 수입과 지출에 관련하여 군현제도와 호적제도를 정비하고, 국민의 토지 소유 균등과 부세 경감을 강조하였습니다.예전에서는 조회·제사·교육·외교 등의 의례 원칙을 제시하였고, 고시제도 강화와 교육 참여 기회를 넓히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사대외교의 중요성과 유교적 의례의 필요성을 지적했습니다.정전은 병전의 한 형태로서, 병제가 사람을 바르게 하는 도덕성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병제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병력과 농업의 조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중 체제, 무기 개량과 훈련 개선, 둔전의 중요성 등이 강조됩니다. 병제를 운영하는 원칙은 백성과 군사를 아끼고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전제로 합니다.헌전에서는 형벌 원칙이 제시되며, 형벌은 정치의 보조수단일 뿐이며 정치의 근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형벌과 법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예방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공전에서는 국가의 물품 제조나 공사 등을 운영하는 원칙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치를 금지하고 재정 낭비를 경계하며, 백성을 지나치게 부려 피로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이 법전에서 제시된 통치규범은 "주례"의 6전체제를 모델로 하되, 중국의 제도를 적절히 조합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조정한 것입니다. "주례"에서는 재상, 과거, 병력과 농업의 조화에 대한 이상을 참조하였으며, 한나라와 당나라의 제도에서는 중앙집권과 국력강화를 위한 부병, 군현, 부세, 서리 선발제도의 장점을 채용하였습니다.또한, 헌전은 "대명률"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이 법전은 개인이 작성하였지만 조선왕조의 건국 이념을 정리하고 제시한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경제육전"과 "육전등록" 등이 작성되어 성종 때 "경국대전"이 편찬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Q. 조선시대 원찰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원찰은 사찰중에서 주로 왕실이나 유력 권력 계층 구성원들의 안녕과 명복을 비는 목적으로 세워졌던 불교건축물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왕들의 능과 가까운 지역이었던 곳에 주로 건립되었는데요. 주로 경기 일대와 지역 수도등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찰의 건립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이는 태조의 계비인 강씨가 죽은 후 1405년에 정릉에 장사지를 내고 흥천사를 세워 원찰로 삼았던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원찰은 왕과 왕비의 진영을 봉안하고, 기일마다 불교식 재를 올려 명복을 비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기일에는 국왕이 직접 방문하여 시설을 화려하게 하고 중요시했습니다.고려시대에는 귀족들의 원찰도 있었습니다. 선원사, 보달원, 청계사, 보광사 등이 대표적인 사찰로 건립되었습니다.그러나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한 이후로는 원찰에서 생기는 폐단이 많아지면서 원당을 금지하는 법령이 제정되어 원찰의 건립이 사실상 금지되었습니다.
Q. 보올스와 진티스의 대응이론에서 학교교육은 어떻게 보는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였던 진티스와 보울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의 기능은 그들이 필요한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교육이라고 보았습니다.진티스와 보울스가 말한, 학교의 규범과 가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노동 규범과 가치에 부합하는 네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1. 학교는 종속적인 노동력을 생산합니다. 학교는 무비판적이고 수동적인 노동자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공장에서의 고된 노동에 적합합니다.2. 학교는 위계질서와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장려합니다. 학생들은 교사의 권위에 복종해야하며, 이후 직장에서도 근로자는 관리자의 권위에 복종해야합니다.3. 교육 시스템은 외부 보상에 의한 동기 부여를 강조합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얻게 될 자격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도록 가르치며, 직장에서 근로자는 임금에 의해 동기부여를 받습니다.4.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소외되고 착취적이 됩니다. 자본가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을 생산 라인의 일부로 취급하며, 노동자는 내재적인 동기가 없고 외부적인 동기에 의해 일하는 것을 강요받게 됩니다.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학교가 호기심과 자기 일에 대한 보상 없이 지루한 수업을 참는 법과 외부 동기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방식을 가르치도록 요구됩니다. 이는 미래의 고용주가 요구하는 규범과 가치와 일치한다고 보았습니다.
Q. 한국사에서 수신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수신전은 조선 전기 과전(科田)이라는 신분 제적인 토지 지급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는 과전을 받던 관리가 사망한 경우, 재혼하지 않은 부인에게 지급하는 수조지(收租地)였습니다. 만약 부인이 자식이 있다면 남편의 과전 전액을 받았고, 자식이 없는 경우에는 반액을 받았습니다. 만약 부인이 이 토지를 받은 뒤 사망하면, 자식이 20살 미만이라면 휼양전(恤養田)의 형태로, 20살 이상이라면 과전으로 다시 지급되었습니다. 이 토지는 재가할 경우 몰수되었고, 이미 재가하여 온 경우에도 다시 지급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과전은 관인의 신분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서, 과전법의 신분 제적인 토지 지배를 나타내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는 고려시대의 전시과 체제에서 군인의 유족이나 퇴역한 군인에게 지급되던 구분전(口分田)과 관련이 있었으며, 유교사상에서 충효와 절의를 중요시하는 덕목으로 간주되었습니다. 1414년부터 과전의 액수가 줄어들며 지급되었으며, 1417년 이 토지를 받은 사람이 개가하거나 사망한 경우에는 그 자손이나 친족이 호조(戶曹)에게 보고해야 했고, 그 분배는 호조에서 직접 관리되었습니다. 1466년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제(職田制)가 시행되면서 이 토지의 지급은 폐지되었습니다.
Q. 조선시대에 지방의 사립 교육 기관으로 높은 수준의 학문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서원은 그 당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비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이자 지방의 사립 교육 기관으로 학자들이 높은 수준의 학문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원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지방의 사립 교육 기관이었다는 특징이 있으, 지방의 선비들이 모여서 서로 학문적인 지식을 공유하고 교류하는 곳이었습니다서원에서는 도서관과 강당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선비들은 서로 연구를 하고 토론을 나누며 서로의 지식을 공유했습니다. 또한, 서원에서는 선비들이 지방의 향약을 중심으로 사회교육도 실시했습니다. 서원에서 원생 교육은 원규에 의해 규제되고 원생의 자율적인 학습과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원규에는 수학규칙, 거재규칙, 교수실천요강, 독서법 등의 준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원생은 선악양적인 생활기록부를 가지며, 출재라는 벌칙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원생은 입지, 검신, 존심을 중요시하며 존양궁리를 실천해야 했습니다. 교수 방법으로는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이 있었습니다. 강은 암송낭독인 배강과 임문낭독인 면강으로 나뉘었습니다. 도기제도를 통해 출석여부를 확인하고 학력에 따라 평가되었습니다. 또한 서원의 제향기능은 인간상과 법도를 제시하는 중요한 교육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춘추향사를 참례하는 것은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했으며 사회 교육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우리나라의 경우,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학자 안향을 모셔와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것이 특징적입니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기능과 성격 등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중국의 서원은 주로 관인 양성을 위한 학교로서의 성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조선의 서원은 사림들의 장수처이자 향촌사림들의 모임 장소로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서원은 일반적으로 서재나 사우 등과 혼용되며, 성격도 비슷하게 이해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