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철학이 모든 학문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맞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철학(哲學, 고대 그리스어: φιλοσοφία)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과 그 대상에 대한 탐구가 주가 되는 학문으로,[2] 그러한 주제로는 존재, 정신, 지식, 가치, 언어 등이 포함되나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철학하는 사람은 질문, 논증, 문답법, 변증법, 과학적 방법 등을 이용해 철학한다.이러한 철학적 주제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서 유서 깊게 다뤄져 왔으며 각자의 문화권마다 고유한 답을 내놓았다. 철학적 주제의 뒤에는 인류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수한 현상과 사물의 기능에 대한 의혹, 궁금증, 회의, 호기심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이 철학의 근본이다. 그렇기에 물리학, 생물학 등의 과학적 주제를 질문하고 답변하는 것 또한 전통적으로는 철학자의 임무였으며, 고대 그리스의 전통에 기반을 두는 서양에서는 자연을 탐구하는 학문을 자연철학 혹은 자연학이라 칭해 왔었다. 서양에서는 19세기에 들어 자연철학이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갔으며, 과학적 방법이 철학의 오랜 주제들에도 접목되며 심리학, 사회학, 언어학 등의 사회과학으로 분과되었다. 즉 철학은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학문의 역사적 그리고 본질적 원류이며 근본이다.
Q. 중국 청나라의 유명한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오랫동안 머문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1859년(철종 10)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에서 태어났다. 과거(科擧)를 2번 낙방하고 우창칭[吳長慶]의 휘하에서 일을 맡았다.1882년(고종 19) 조선에서 신식군대와 구식군대간의 차별문제로 구식군대가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일으켰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을 빌미로 오창칭을 따라 조선으로 부임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임오군란의 주동자로 지목하고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이후 통리조선통상교섭사의(統理朝鮮通商交涉事宜)가 되어 조선에 계속 주재하였다.청나라 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자 친청(親淸) 수구세력과 갈등을 하던 개화파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지속되는 압박에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가 일본과 손잡고 친청수구정책에 대항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주둔하던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하며 개화파를 공격하여 고종을 구출했다. 이 사건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양국의 군대를 철수시키는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게 된다.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철수하지 않고 이후에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에 취임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청군을 파견하게 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빌미삼아 조선에 상륙하였다. 이는 결국 청일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 집권자였던 리훙장[李鴻章]이 실각하고 위안스카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병권을 장악하게 되었다.위안스카이는 서태후(西太后)의 총애를 얻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서태후가 죽은 후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1911년 신해혁명으로 다시 군권을 장악하고 쑨원[孫文]과 손잡고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켰다. 이후 1913년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 되었고, 1916년 6월 사망하였다.위안스카이는 조선에 10여 년을 거주하며 지금의 중구 충무로 거리 일대를 사들여 중국인 전용 거리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국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 세력을 확장시켜 충무로 일대를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다.
Q.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계속해서 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크라이나-러시아전쟁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러시아 측의 주장이었다. 1989-91년 국제 냉전이 종결된 후 서방의 군사동맹인 나토가 러시아를 향해 계속 동진해 러시아가 안보 위협을 느꼈기에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맞섰다는 주장이다. 나토 동진을 전쟁의 핵심 원인으로 간주하면 이 전쟁은 러시아와 미국의 대리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 탈냉전기 미국의 군사적 패권 전략과 러시아의 탈소비에트 지역 통합 전략 사이의 충돌이 전쟁의 원인으로 여겨진다. 미국은 탈냉전 후 세계질서를 일방적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러시아는 탈냉전 과정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기에 그것에 걸맞은 안보 이익을 관철하고자 한다. 미국과 러시아의 패권과 안보 갈등이 우크라이나에서 충돌했다고 여기는 분석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키거나 옹호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주장한 구실들을 무심하게 전쟁의 원인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나토 동진이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장 우크라이나를 침략할 명분이 되지는 않는다. 나토 가입은 철저히 우크라이나인들의 주권과 자결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명백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고, 주권 침해다. 안보 이익은 조정과 타협의 문제지 전쟁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반면, 미국의 책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우선 미국과 러시아는 1990년대 내내 그리고 2001년 9.11 테러 후에도 경제와 외교 및 안보 영역에서도 협력 정치를 선보였다. 그때 분명 양자는 새로운 평화체제 형성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평화의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고 평화 협력관계의 제도화를 포기하고 군사동맹의 확대에만 매달렸다. 군사동맹이 존재하는 한 동맹 바깥의 대결 내지 이질 세력은 항상 현실적 또는 잠정적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와 ‘적’의 경계를 강화하는 군사동맹은 필연적으로 군사적 우위와 동맹 강화를 목표로 삼게 된다. 군사동맹을 통한 안보 강화는 실상 현실적 갈등 세력 내지 잠정적 적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뿐이지 평화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사실 나토 국가들은 이미 돈바스내전 당시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우크라이나 군대와 함께 군사훈련을 수행했다. 나토는 이미 분쟁 지역의 군사 긴장을 계속 고조시켰다. 게다가 미국은 작년 11월부터 전쟁 위기 상황에서 러시아의 협상 요구를 무시했다.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전쟁 발발 전에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를 제안했지만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못했다. 상황은 곧 인간의 이성과 조정 능력을 넘어 안보론에 빠졌다. 갈등이 제어되지 않은 무책임의 대결 정치로 귀결되었다. 전쟁의 또 다른 원인으로 간주한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갈등이다. 현실의 대결과 적대는 항상 역사를 소환하는 법이다. 두 국가의 역사적 뿌리가 같음에서 양국의 깊은 문화적 연루와 긴밀한 인적 연결을 확인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양국 사이의 불화가 강조된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병합한 사건이나 1930년대 농업 집단화의 결과로 발생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참화, 즉 ‘홀로도모르’가 새삼 주목받는다. 다수 우크라이나인들은 서구 지향과 반러시아 감정이 뚜렷하다. 반면, 우크라이나를 여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보는 러시아인들은 70%에 달한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역사적 갈등과 정체성의 차이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지구는 항상 불바다일 것이다. 그것 또한 전쟁의 필연성이 아니라 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 결집과 동원의 이데올로기임에 더 주목해야 한다. 요컨대, 나토 동진과 안보 이익 주장 및 역사적 갈등에 기인한 이질적인 국가 정체성은 전쟁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양측 정치엘리트 모두에게 각기 전쟁 정당화의 도구다. 역사에는 항상 평화의 대안이 없지 않다. 전쟁은 안보 구조나 패권 대결의 필연적 귀결이 아니다. 과거에 불화가 있었다고 해서, 현재 자아상과 타자상이 다르다고 해서 곧장 전쟁이 일어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전쟁의 배경이나 이유가 아니라 결과이자 변명이다. 반대로 전쟁은 늘 그와 같은 요인을 내세운 정치 지도자들의 무책임한 선동과 긴장 고조를 제어하지 않는 행위의 파국이다.
Q. 베트남도 우리나라처럼 생활 속에서 한자 말을 많이 사용하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베트남은 중국의 남쪽에 있는 이웃나라로 중국과의 교류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기원 전후로 한자가 베트남에 전해졌고 이후 베트남은 정부의 공식 교류나 문화교육, 경제무역 등에서 모두 한자를 사용하였다. 베트남의 지식인은 한자를 사용하여 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당나라(618~907) 때 베트남에서 많은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서 중국의 문화를 학습했다. 베트남 역사상 19세기 말까지 한자가 줄곧 베트남 관청의 정식문자였으며, 20세기 초까지 한자는 베트남 학교에서 학습하고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문자였다. 또한 한자가 베트남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문자였고 동시에 베트남 문학창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문자이다.다만 한자는 베트남의 말을 기록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아서 문자와 구두어가 분리되어 지극히 불편하였다. 그래서 약 11세기 전후로 베트남 사람들은 한자의 자형을 빌리고 형성과 회의, 가차 등의 조자방법을 운용하여 새로운 문자인 ‘츄놈(喃字)’을 만들었다.[네이버 지식백과]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의 한자 전파 (중국문화와 한자, 2013. 3. 28., 스딩궈, 뤄웨이둥, 이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