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성균관대 영문학 및 신문방송학과 전공

장경수 전문가
동화세상에듀코
Q.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 하였는데요 미국이 독립 하려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의 대영 제국은 다른 제국에 손해를 입히더라도 제국에 이익만 된다면 어떤 정책이던지 무엇이든 좋다는 중상주의적 정책의 일환으로 항해법을 제정하여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경제를 규제하였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이러한 정책은 한동안 유명무실하였으나 점차 강력히 추진되어 식민지와 영국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1761년 매사추세츠주의 변호사 제임스 오티스는 이러한 대영 제국의 정책이 명예혁명을 통해 작성된 1689년 권리장전에 보장된 식민지 주민들의 권리를 명백히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티스는 재판에 패배하였으나 존 아담스는 "여기에서 미국 독립이 비롯되었다"고 평했다. 1762년 패트릭 헨리는 버지니아주의 2페니 법을 조지 3세가 거부하자, “왕이 자신의 국민에게 이로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만 폭군일 뿐이며 왕으로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서부 확장1763년 조지 3세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경계로 그보다 서쪽에 있는 땅을 개척하거나 구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이후 아메리카 원주민과 식민지 이주민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려는 시도였으나, 서부로 확장을 강력히 원하던 식민지인들은 영국 왕의 이러한 정책에 강력한 반감을 보였다. 이러한 반감은 독립 전쟁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대표자의 참여 없는 세금 부과영국은 7년 전쟁의 승리로 캐나다, 플로리다, 미시시피강 동안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토 등을 새로운 식민지로 확보할 수 있었으나,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해 재정이 고갈될 지경에 이르렀다. 영국은 이러한 재정 지출을 식민지에 전가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영국은 《설탕법》, 1765년 《인지세법》, 《타운젠드법》 등을 통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세금의 부과는 식민지 대표자들의 참여없이 영국 의회 단독으로 이루어졌으며, 식민지 대표자들은 "대표자의 참여 없는 세금은 무효"라며 맞섰다. 1773년 《차법》은 결국 ‘보스턴 차 사건’을 불러일으켰으며 ‘미국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또한 독립 전쟁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Q.  17세기 후반부터 탈성리학의 경향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부에서는 성리학적 사회윤리의 보급과 같은 방법으로 지배체제의 강화를 시도하였으나 향촌사회는 결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 이는 정부의 정책이 사회변동의 가속성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총체적 수치는 증가되었다고 하나 그 혜택의 대부분은 지주들에게 돌아갔을 뿐이고, 부농으로 성장한 자영농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많은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숙종 37년(1711)에는 전라도에서 대량의 유민이 발생하였는데, 무안에서만도 5천호 가운데 2천호가 유민화할 정도였다. 숙종 43년에는 충청도에서 10만 명이 유민이 발생하였고, 경상도에서도 영조 9년(1733)에 약 17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피폐한 향촌사회의 현실에서 성리학적 지배체제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지배층은 사회윤리의 보급을 표방하였지만, 그 이면의 목적은 민중에 대한 경제수탈을 효율적으로 해내려는데 있었다. 따라서 정부의 지배체제 강화 시도는 향촌사회 안팎에서 민중의 저항을 불러왔다. 아울러 성리학은 공리공담과 형식에 치우치는 경향이 심해져 점차 관념화, 사변화되어 갔을 뿐 아니라, 교조주의로 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로지 성리학만을 ‘正學’으로 내세우고 그 나머지는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과 종교도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西學, 즉 天主敎는 물론이고 기존의 佛敎, 道敎, 圖讖을 左道나 邪學·異端 등으로 배격하였을 뿐 아니라, 유교의 일파인 陽明學까지도 이단으로 파악하며 성리학의 유일화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현상은 필연적으로 사상의 停滯를 가져왔다. 이에 성리학의 정체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체계가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변동의 가속화’라는 현실문제와 연결되면서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미 교조화의 경향을 띠고 있던 성리학의 사상체계로는 이러한 여러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실개혁에 필요한 사상체계가 요구되었고, 이것이 곧 ‘實學’이다.
Q.  인류는 언제 어떻게 술을 발명하게 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술의 기원은 선사 시대 사람들이 우연히 물과 과일을 햇볕에서 발효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의도적으로 발효시킨 음료에 대한 증거는 신석기 시대(기원전 1만 년)로 추정되는 석기 시대 술병의 형태로 남아 있다. 서남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도 술병이 발굴되었다.
Q.  마네와 모네의 그림에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첫째, 두 사람은 빛에 대한 관심 정도가 달랐다.모네는 빛에 대한 인상을 시시각각 반영하여 같은 대상을 여러 점 그렸다. 하루에 14점까지 그리기도 했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하며 1890년부터 연작을 그려낸다. ‘건초 더미’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 수련 연못’ 등은 하루 빛의 변화뿐만 아니라 계절과 날씨를 반영하며 빛을 탐구한 결과다.반면 인상주의 개척을 도운 ‘인상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네는 그리는 순간의 빛의 상태를 반영하는 정도여서 같은 대상을 여러 점 그리지는 않았다.둘째, 두 사람은 관심을 가진 대상이 달랐다. 모네는 실외 그림이었다. 산과 바다, 강, 정원, 들판 등 주로 자연이 소재였다. “내가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꽃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꽃과 함께할 것이다.” “나에게 빛과 대지는 곧 끌림이자 회화의 모든 주제다.” 모네는 ‘루앙 대성당’ 연작을 그리며 잠시 머문 도시 생활조차 힘들어했다.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가족이 가끔 등장했다. 드물게 마네의 작품과 비슷한 이름으로 모네는 ‘생라자르역(1877)’ ‘풀밭 위의 점심(1865~1866)’을 그렸다. 이 동명의 작품에서도 모네는 빛에 중점을 두어 풍경을 그릴뿐 인물의 표정 등에는 크게 중점을 두지 않았다.모네와 달리 마네의 관심사는 파리 도시의 변화와 도시에 살아가는 주변 사람의 모습이었다. 자연은 배경일 뿐이어서 대부분 실내에서 그렸다. 마네는 평생 파리 북서쪽에 살며 도시생활을 관찰했다.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조르주외젠 오스만이 현재의 파리 도시로 개발하는 것을 마네는 찬탄하며 바라보았다.19세기 후반 공원 음악회를 즐기는 도시인의 여가생활을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1862)’에, 피크닉을 즐기는 여가생활이 유행해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를 그렸다.그는 “루브르에 다녀오며 기관차에 올라보니 곁에 기관사와 소방관이 있었다. 이들은 삶은 고되지만 현대의 영웅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마네는 ‘생라자르역(1874)’을 그린다. 마네는 도시인의 삶을 반영하려 인물의 표정까지 애써 그렸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생라자르역’을 보면서 초상화인지 풍경화인지 혼란스러워했다.마네는 “나는 이 생활을 사랑한다. 살롱, 소음, 빛, 파티, 이 모든 것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말년에 ‘폴리 베르제르의 바(1882)’라는 역작을 남긴다.셋째, 쓰는 색이 달랐다. 모네는 빛에 의한 색을 표현하다 보니 검은색을 거의 쓰지 않았고, 마네는 검은색을 즐겨 쓰는 편이었다. 그림자를 표현할 때도 모네는 파란색과 보라색으로, 마네는 검정색으로 표현하는 차이를 보인다. 한마디로 모네의 그림은 야외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이해하기 쉽다.모네는 ‘빛의 화가’로 불리는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다. 여신을 그린 신화와 역사화 흐름에서 벗어나 야외에서 태양 빛을 탐색한 업적을 남긴다. 모네와 우정을 나누며 많은 영향을 준 마네는 그가 살던 시대를 깊이 연구한 화가였다. 그는 급진적인 미술가로 난해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에서 마네는 고전의 대표작을 차용하여 고전과 현대화의 차이점을 동시대에 명확히 알린 업적으로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네와 마네 두 사람은 고흐, 고갱, 피카소, 마티스, 세잔 등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치며 현대미술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다.
Q.  대표적이 진경산수화로는 어떤작품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대표작으로는 정선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전도(金剛全圖)」 ·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를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개인 소장), 김윤겸의 「영남명승첩(嶺南名勝帖)」(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김응환의 「금강산화첩」(개인 소장), 김석신의 「도봉산도」(개인 소장), 심사정의 「경구팔경도(京口八景圖)」(개인 소장)가 있다.또한 이인상의 「구룡연도(九龍淵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수영의 「한림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강세황의 「송도기행명승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사군첩」(개인 소장), 이인문의 「단발령금강전도(斷髮嶺金剛全圖)」(개인 소장), 임득명의 「서행일천리장권(西行一千里長卷)」(개인 소장), 조정규의 「금강산병풍」(개인 소장) 등도 있다.
2122232425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