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원래 쿠데타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프랑스어의 쿠데타(Coup d'État, [ku d‿e.ta])에서 유래된 말로, 직역하면 '나라(État)의(de) 타격(coup)'이라는 뜻이 된다.영어로 ‘stroke of state’, ‘blow of state’에 해당하는데, ‘국가에 대한 일격 또는 강타’로 번역되는 것처럼 주로 비합법적인 무력 또는 군사적인 수단으로 정권(政權)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보통 프랑스어인 쿠데타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 전형적인 예가 프랑스에서 있었기 때문이다(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네이버 지식백과] 쿠데타 [stroke of state, blow of state, coup d’État]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Q. 우리나라 범죄자의 신상공개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또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피의자의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제도. 두 법률의 해당 규정은 모두 2010년 4월 15일부로 신설되어 시행되고 있다.2. 제정 배경대한민국은 1990년대까지는 미국이나 일본이 그러하듯 피의자의 신상을 신속히 공개하고, 언론에서 이를 취재, 보도하는 것이 당연했다. 사형이 활발하게 집행되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문민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중대범죄 및 흉악범죄는 발생 직후 피의자의 실명은 물론, 집주소를 포함한 정보를 상세하게 공개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사형 집행을 중단했던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 급변하였는데, 구체적으로는 1998년 대법원이 신상 공개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봉쇄되었다.물론 이 판결 이후에도 모든 언론이 새로운 기류에 순응한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국민적 공분을 산 사건에서는 언론사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법적인 리스크를 감내하고 신상을 보도하는 경우가 있었다. 2000년 부산, 울산, 경남 연쇄살인범 정두영,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의 김대한 역시 사건 발생 당일 그의 신상이 언론에 의해 공개되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으로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경찰은 내부 규정을 변경해 피의자의 신상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언론의 피의자 신상 보도는 더욱 감소하였다.보도 문화가 바뀌자, 희대의 연쇄살인범인 유영철(2004년 검거)과 정남규(2006년 검거)는 검거 당시에도 신상이 바로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강호순(2009년 검거)의 경우 2009년 1월 31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자체 취재로 입수한 강호순의 얼굴 사진을 1면에 전격 보도하게 되고, 이어 KBS와 SBS가 이 사진을 당일 저녁 메인뉴스에서 그대로 방송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는 가족관계를 함께 보도하여 연좌제를 부를 수 있다는 인권단체의 비난에 휩싸였다. 한편, 한겨레는 무죄 추정의 원칙과 경찰의 수사 결과 공개 이후 보도가 준칙이라는 원칙주의 및 인권 보호를 내세우며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하게 오마이뉴스는 '난 ·이 더 무섭다' 기사 등으로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언론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당시 오마이뉴스는 "중요한 것은 피의자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이토록 잔인한 짓을 했다는 것이며,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언론의 논조에도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여론을 막을 수는 없었고, 경찰은 2월 1일 현장검증에 참여한 강호순에게 마스크를 씌우지 않고 그의 얼굴을 공개하였다.
Q. 1991년 소련은 왜 붕괴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국 BBC가 지목한 소련붕괴의 원인 5가지](1) 경제적 요인BBC는 소련의 가장 중요한 붕괴 요인 중 하나로 서구 국가들의 시장 경제 체제와 다른 중앙 계획 경제 체제를 들었다. 당시 소련의 체제는 국가가 모든 생산품(자동차와 신발, 빵 등)의 생산량을 정했고, 또한 시민 개개인에게 필요한 물건이 몇 개인지, 물건의 가격은 얼마인지, 임금을 얼마나 지급해야 하는지도 결정하는 국가통제 경제였다.이러한 소련의 경제체제는 이론상으로는 효율적이고 공정했으나, 실제로는 공급은 항상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고, 화폐는 종종 의미를 상실할 정도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당시 많은 소련 주민들은 기초 생필품이 부족해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없었다.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것은 보통이었고 그나마 살 수 없는 때가 많았다.그런데 이러한 계획경제 체제를 더욱 붕괴시킨 요인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소련과 미국의 우주 탐사 및 군비 경쟁이었다. 소련이 비록 지구 궤도에 인류를 보낸 첫 번째 국가였고, 핵무기와 고도로 발달된 탄도 미사일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들을 개발하고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소련은 이러한 엄청난 국방비용 소요를 위해 석유, 가스 등 천연자원을 활용했지만 1980년대 초 유가가 폭락하면서 가뜩이나 휘청거리던 경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된다.그러자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러한 위기 타개를 위해 시장 경제 원리 몇 가지를 도입했지만 이미 곪을대로 곪은 소련의 경제를 개혁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소련 경제의 상태가 심각했다는 의미다.결국 소련 정부당국은 화폐개혁 등의 개혁 조치를 취했지만 주민들의 좌절감만 키우면서 결국 소련은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되었다.(2) 이데올로기 측면소련의 몰락을 재촉한 두 번째 요인은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BBC는 지적했다. 수십 년간 억압적인 정권하에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질문하고 불평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소련 사람들에게 고르바초프는 언론의 자유를 전격 허용하는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시행했다.그러나 그러한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이 소련이라는 국가의 사고 체계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오히려 어설픈 개혁정책은 소련 주민들에게 공산당 통치 체제가 비효율적이고 억압적이며 부패에 취약하다는 생각만 들게 만들었다.(3) 민족주의 측면다민족 국가였으며, 러시아 제국의 계승자였던 소련은 당시 15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규모였던 러시아에 의한 인종탄압과 기근 등은 각 공화국 주민들에 의한 자결권 요구로 번지면서 국가연합이라는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결과가 해체로 이어진 것이다.(4) 상실감과 박탈감 측면소련 주민들은 오랫동안 서방세계의 자본주의 국민들이 가난과 타락에 시달리고 있다고 배워왔으나 실제로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 여행이 잦아지면서 정부의 선전선동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소련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소련 붕괴의 직접적 요인이 된 것이다.(5) 리더십 측면BBC가 소련붕괴의 마지막 요인으로 꼽은 것은 리더십이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와 대중의 사기저하를 막기 위해 급진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르바초프는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말미암아 해외에서는 인기를 얻었으나 정작 소련 주민들에게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소련내의 기득권 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이마저도 실패했고 이후 옐친과 다른 지도자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결국 여러 공화국들이 독립투표로 이어지면서 소련은 마침내 붕괴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