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요?
정말 광복이후 혼돈의 연속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 여순사건인데요. 그런데 이 사건이 발생하게 된 정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입니다.
여순사건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반란 배경과
-여기에 호응했던 여수·순천 지역의 동향입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건의 시발점인 제 14연대의 반란으로, 제 14연대는 1946년 2월 15일 광주에서 편성된 제 4연대가 모체이며 여기에는 여순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지회, 홍순석 등이 포진, 김지회와 홍순석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생으로 이 기수는 80%가 넘는 인원이 사명 및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되어있었으며 그 중 좌파적 성향을 띠는 인물도 상당수였습니다. 이는 당시의 간부 모집 주체였던 미군정이 인력 충원에 집중하고자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 성향을 거의 신경쓰지 않았던 것에서 기인합니다.
이후 제 4연대는 제1대대를 주축으로 하여 1948년 5월 4일 여수 신월리에서 제 14연대가 창설, 창설 요원 가운데 기지회, 홍순석과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 지창수 등 사건을 직접 주도하게 되는 하사관들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창설 과정에 좌익 계열 모병관들은 반이승만 계열, 좌익 수배 사범 등을 적극적으로 모병, 그 결과 연대 내에 남로당의 세포 조직이 침투하게 됩니다.
또, 제 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 가지고있던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도 봉기의 원인으로, 창군 이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전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이 같은 인식은 국군 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1947년 제 14연대의 관할 지역인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는 군, 경간의 물리적 충돌이 세 차례나 발생,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종결, 이는 제 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여수, 순천 지역의 정치적 동향으로 해방 직후 이 지역은 우익 계열의 우세 속에 좌, 우익간의 공존관계가 지속, 평온했던 이 지역의 분위기는 1948년 급변하는데 이는 단독선거 시행을 둘러싸고 우익과 좌익이 충돌했기 때문으로 선거가 다가오면서 빈발하기 시작한 양측간의 충돌은 유혈사태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며 투표소 습격, 경찰지서 습격 행위로 발전, 그러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되고 남로당의 투쟁이 점차 급진, 폭력화되면서 이 지역의 단독 정부 반대 움직임은 대중적 운동보다 점차 소수 인원에 의한 급진적 투쟁의 형태로 변모되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 경비대 제14연대에서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는데 이 사건의 가장 큰 배경은 제주도민중항쟁의 진압을 위해 제주에 출동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여수 제14연대가 동포 학살은 할 수 없다는 보도문을 발표하고 제주 파병을 거부하면서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남로당의 지령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군인반란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로당은 사건이 일어나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결국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주 4.3사건( 1948.4.3)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 반대하는 좌익과 우익의 무력충돌 사태)을
진압하기 위한 육군본부의 명령에 불복, 여수 주둔 14연대 소속, 좌익계 장교 김지회,홍순석,하사관
지창수 등이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게 원인 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순사건의 가장 큰 배경은 제주도민중항쟁의 진압을 위해 제주에 출동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여수 제14연대가
동포 학살은 할 수 없다는 보도문을
발표하고 제주 파병을 거부하면서
발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