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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8283
103828323.04.06

4.3일 사건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최근 4월3일에 계속 제주 4.3 사건이라고 떠돌아 다니는글들이 있던데

어떤사건이길래 이렇게 회자되는건지 자세히 알려주실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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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0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제주 4.3 반란사건(1948년 4월 3일)

    이 반란사건은 현재 많이 아니 완전히 왜곡됐습니다. 4.3 평화운동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요지는 해방이전과 해방후 38도선 이남에 남은 남로당(공산당)의 조직원들이 제주도를 점령하여 벌인 공산화 적공질이었다는것입니다. 당시 북한은 이미 46년 조선인민 민주주의를 수립했고, 군대도 가지고 있었고,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단독 정부를 수립합니다.

    이때 남로당은 단선 및 단정에 반대하고자 47년 대구10월 폭동을 주도했고, 48년 5월에 있는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방해하고,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벌인 활극입니다.

    고로 평화운동이 아니며, 당시정부(이승만정부)에 대한 반란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습니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습니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습니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주 4·3사건 [濟州四三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제주 4.3 사건 배경 제주도에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무력 충돌 사건을 시작으로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민들까지도 사회주의자로 몰아 대량 학살한 사건으로 공식적으로는 사망자가 약 3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수를 알 수 없을 정도도 수많은 목숨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사건의 시작 광복 이후 1947년 3월 1일 제주도 관덕정에서 3.1 운동 28주기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그때 경찰이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6살 정도의 어린아이를 치고 그냥 지나갔고 다친 아이를 살피지 않는 경찰을 보고 화가 난 군중들이 그를 잡으려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지며 쫓아가게 됩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4·3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 군정(軍政) 기간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7년 7개월에 걸친 남한 내의 내전이었다. 총 희생자(사망자)는 2만5천-3만명으로 추산된다. 미국 군정 기간에 일어난 사건으로, 미군은 이 사건과 관련, 제주도를 '붉은섬'으로 지목했었다.

    해안에서 5km 이상 통행자를 폭도로 간주, 총살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제주도의 중산간 지역은 적의 땅으로 사선(死線)이 그어졌다.

    이 내전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것이 주 원인. 4.3사건은 종료됐으나, 분단체제가 고착화 됐다.




  •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수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남북한의 이념갈등이 계기가 되어 들고 일어난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과 국군, 경찰 간의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하였습니다.

    해방 후 혼란기에 발발하여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사건입니다. 이로 인하여 아직도 제주도민들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어 이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주도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 전쟁 전 단계에 일어난 사건으로, 제주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민중항쟁 사건 중 하나입니다.


    제주도 4.3 사건은 국민유전제 실효와 북한으로의 이어짐을 염려한 정부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민생사업을 중단시키자, 제주도 주민들이 이에 반발하여 민중항쟁을 일으킨 것이 시작입니다. 이 사건은 이후 정부와 군이 민중항쟁을 진압하면서 폭력사태가 일어나, 수많은 민간인과 청년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불신과 불만, 그리고 북한으로의 이어짐에 대한 우려가 깊이 반영된 사건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남기며 국가적인 상처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이후 정부는 이 사건을 민중항쟁이 아닌 공산주의 세력의 반란으로 간주하고, 대규모 진압작전을 벌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놓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거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3.1절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을 발단으로 서북청년회등의 극우단체의 과잉진압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일제의 패망 이후 미군정의 편의로 인해 대부분 대한국민의 국군, 경찰 된 정부 인력과 해당 도민에 남로당이 일부 있다는 이유로 좌파로 몰린 도민과 충돌, 그 이후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극우 무장단체의 테러를 북한의 남치미 위협을 이유로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이 적극 개입, 지시했습니다.

    학살기간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하고 그 후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마을을 장악하여 밤에는 봉기세력들이 점령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제주도는 이미 일제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한 것도 모자라 경 7호 작전이 시행되어 섬 전체가 초토화될뻔한 적이 있었고 1945년 이후부터 7.27정전협정 이전까지 사상 최악의 기근에 시달렸는데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