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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06.02

폐비윤씨사사 사건에 대해 알려주세요~

연산군의 어머니인 계비 윤씨와 관련된 폐비윤씨사사 사건은 무엇인가요?

어떤 이유 때문에 윤씨를 폐비하고, 사약을 내린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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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윤씨의 아버지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무(起畝)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이후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1476년 왕비로 책봉되고 이 해 세자 융(㦕 : 뒤의 연산군)을 낳았다.

    왕비가 된 뒤 투기가 매우 심해 국모로서 부덕한 일을 자주 일으켰다. 1477년에 비상(砒霜)을 숨겨 왕과 왕 주위의 후궁을 독살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아 빈(嬪)으로 강등되려는 수모를 겪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일로 왕과 모후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격분을 유발해 이 해 여러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비되어 친정으로 쫓겨났다.

    폐비된 뒤 바깥세상과의 모든 접촉이 금지되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전에 행한 일들을 뉘우치고 부덕을 쌓는 등 근신하였다.

    한편, 1482년 일부 조정 신료들에 의해 세자의 어머니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졌다. 즉,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면서 새로운 정치문제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폐비를 미워하는 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정희왕후(貞熹王后)·소혜왕후(昭惠王后)는 여전히 폐비를 혐오했고, 왕의 후궁들인 숙의(淑儀) 엄씨(嚴氏),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폐비를 더욱 모함하였다.

    그런데 폐비의 혈육인 세자가 점점 성장하자 인심도 점차 폐비를 동정하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이에 성종은 영돈녕부사 이상 삼정승·육조의 관원 및 대간들을 모아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왕은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사사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묘명도 없이 장단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1489년 세자 즉위 이후를 고려한 왕의 배려로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명명하고 묘지기를 두어 관리하였다.

    그리고 이어 장단도호부사가 속절(俗節)마다 제사를 지내게 조처하였다. 1495년(연산군 1)연산군이 생모의 폐비사실을 알게 되면서 신원(伸寃 : 원한을 풀어버림)이 모색되었다. 1497년에 개장(改葬)한 뒤 효사(孝思)라는 묘호(廟號)와 회(懷)라는 묘호(墓號)가 추봉되었다.

    1504년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한 무단적 분위기에서 성종의 “폐비의 추숭을 허하지 말라.”는 유교(遺敎)가 무시되면서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묘도 회릉(懷陵)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효사의 묘호도 혜안전(惠安殿)으로 개칭하면서 완전히 신원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다시 관작이 추탈된 뒤 영영 신원되지 못하였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출산한 정궁이면서도 투기심 등 부덕한 행위로 폐비되었다가 참극을 당하였다. 이것이 갑자사화의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연산군이 실정으로 치달아 폐위되는 비극의 촉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폐비윤씨사사사건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폐비 윤씨는 연산군의 어머니이며 1473년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지고 1476년 왕비에 책봉되고 세자 융을 낳았습니다.

    투기가 심한 그녀는 왕비가 된 후에도 국모답지 않게 투기하여, 1477년 비상을 숨겨둔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왕과 그 주위의 후궁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뻔한 수모를 겪었으며 1479년 투기로 왕의 얼굴을 할퀸 일로 왕과 인수대비의 진노를 사서 폐비가 됩니다.

    이후 세자가 장성함에 따라 폐비윤씨의 처우문제가 쟁점화되면서 여론도 폐비에 대한 동정론으로 기울었고, 더이상 보고만 있을수 없던 성종은 삼정승과 6조의 판서 및 대간을 모아 폐비윤씨 문제를 논의합니다.

    이 논의에서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 좌승지 이세좌로하여금 사사하게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종의 잦은 후궁봉작으로 투기심을 느낀 윤씨는 1477년(성종 8)에 후궁 독살 혐의(처소에 비상을 숨겨 두었다가 발각된 사건)로, 성종과 대비들의 진노를 사 폐위하여 후궁으로 강등될 뻔하였으나, 궁인의 죄로 덮어 위기를 모면 하였다. 하지만, 그 2년이 지난 1479년(성종 10)에 투기심으로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과 왕비로서의 실덕(失德)함을 이유로 폐위되어 사가로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폐위가 끝이 아닌 1482년(성종 13)에 윤씨의 죄를 다시 의논하여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성종은 세자 연산군을 생각하여 윤씨지묘(尹氏之墓)라는 묘비와 묘지기 2인을 배치하고,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속절(俗節)마다 제사를 허락하였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