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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이 안시성 양만춘에게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당태종이 직접 이끈 군대가 패배를 거둔다는 것은 당나라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황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태종 이세민이 안시성 양만춘에게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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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던한굴뚝새285
    모던한굴뚝새285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당태종의 깃발과 수레의 덮개 등을 발견하는 즉즉 성루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면서 황제를 도발했다. 태종이 화를 내자 이세적은 "성을 함락시키는 날 저들을 모두 묻어버리게 해주십시오." 라고 청했다. 이 소식이 성 내부에까지 들려오자 안시성 군사들은 이미 배수진을 쳤다고 생각, 더욱 굳게 지키기를 각오했다.

    이후 여러 차례 공습이 시도되었으나 당군은 번번이 성벽을 넘는 데 실패했다. 이내 전투가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당태종을 포함한 당군 수뇌부는 고뇌에 빠졌다. 이때 주필산 전투에서 패전한 고구려 항장, 고연수와 고혜진이 안시성은 포기하고 오골성의 성주는 늙어서 공격하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니 오골성을 함락시킨 다음에 바로 평양성을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놨다.하지만 당태종의 오른팔과 같았던 장손무기가 나서서 "천자께서 직접 하시는 정벌인데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됩니다. 지금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으로 돌리면 분명 100,000명의 적군이 우리 뒤를 칠 것입니다. 안시성과 건안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합니다."라며 반발하자 안시성 공략을 계속하기로 결정이 났다.

    이후 안시성을 포위한 당군과 수성 중인 고구려군 사이에는 산발적 교전이 몇 주간이나 이어졌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들려오는 닭과 돼지 소리를 듣고,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면서 성 안의 연기가 미미해졌지만, 지금 닭과 돼지가 시끄러운 것은 군사들에게 잡아먹히고 밤 중에 나와서 기습할 것이기 때문이다."라 여기면서 이세적에게 대비하도록 했다. 그 뒤 정말로 밤에 수백 명의 고구려군이 성벽에 줄을 매달아 내려왔고, 이 소식을 들은 당태종이 성 아래로 군사를 불러 공격해 수십 명을 죽이고 물러나도록 했다.

    전투 말기, 이도종이 무리를 감독해 성의 동남쪽 귀퉁이에 토산을 쌓고 안시성을 압박했는데, 안시성에도 이에 대응해 성을 더 높이 증축했고, 여러 차례 군사들이 교대로 싸워 하루에도 6번에서 7번 교전할 정도였다. 당군이 충차와 포석으로 성벽을 부수자 안시성은 목책으로 부서진 부분을 수리했으며, 이도종이 싸우다가 부상당했고 당태종 자신도 다치는 등 사상자가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토산을 완성하는 데 2개월이나 걸렸다. 당시 당군은 토산을 쌓는 데만 연인원 500,000명을 동원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토산이 완성되고, 꼭대기에서 성곽까지는 몇 장 정도 떨어져 있어 내려가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이도종은 부복애를 시켜 토산 꼭대기에서 대비하게 했지만,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거느리고 떠나고 있던 중에 고구려의 정예군 수백 명이 부서진 틈을 통해 기습에 성공,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면서 참호를 파고 지켰다. 결국 당태종은 화가 나서 부복애를 참수하고, 조리돌렸으며, 이도종 또한 죄를 청했으나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한 공로가 있어 용서했다.

    요동성이 일찍 추워지며, 풀은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지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태종은 철수했다. 이때 당군의 퇴각 루트가 안시성에서 철수해서 요하 하류의 요택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기록에는 요택이 진흙창이라 겨울철에 병사들이 건너는데 몹시 고생해 태종 자신까지 나서서 병사들과 함께 수레를 밀어야 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9]

    태종 이세민이 최후의 자존심 때문에, 성주에게 성을 잘 지켰다는 공으로 비단을 하사하고, 품위를 지키며 퇴각하려 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나라는 안시성의 대패로 인해 고구려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시켰으며, 당의 주력군이 고구려 원정을 한 틈을 타서 튀르크계 설연타(쉬르-타르두쉬)의 힐리구리실설사다미가한이 하주를 노략질했다.[10] 이로 인해 태종 이세민은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주를 직접 정벌하려다가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세민은 자신이 제1차 고당전쟁에서 고난을 겪었던 사실들 및 철수하는 과정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추격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예 빼 버리고 자기 입맞에 맞게 역사서를 기록했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진서》에는 고구려를 아예 기록하지 않았다.

    안시성 전투는 제1차 고구려-당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 가운데 하나로서 대미를 장식했으며, 당태종과 당나라의 주력군이 패배함에 따라, 안시성 전투는 이후에도 동아시아에서 강력하게 각인이 되었다. 당태종은 안시성의 참패 후, 수양제 양광이 행한 당장의 무리한 대규모 원정보다는 장기적으로 대규모의 원정을 준비하면서 고구려와는 계속하여 소모전 및 유격전을 치르고, 신라와는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때문에 안시성 전투는 이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역사에서 큰 분기점이 되는 역사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