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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0

모짜르트의 교향곡이 유명한 이유는?

안녕하세요

모짜르트의 교향곡이 지금까지 회자되면서 유명한 이유가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서 인가요? 아니면 연주하기가 어려워서 인가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인가요??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5.21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모짜르트 생애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가톨릭 성당에서 세례명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라틴어: Joh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였다. 흔히 알려진 중간 성명인 아마데우스(독일어: Amadeus)는 세례명 중간 성명의 그리스어 어원 테오필루스(Theophilus)를 라틴어로 바꾼 것이다.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이었는데, 볼프강의 누나인 나네를을 어려서부터 가르쳤다. 전한 바에 따르면, 볼프강은 세 살 때부터 누나를 보고 스스로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다고 한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어린 아들의 재주를 알아보았고, 볼프강에게 직접 피아노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나네를 뮤직북에 쓴 레오폴트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볼프강은 네 살 때 여러 곡을 배웠으며 다섯 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어린 모차르트의 작곡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집에서 그를 시험하기도 하였지만,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난 작곡 실력과 재능을 보였고, 사람들은 비로소 모차르트를 믿기 시작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아버지 레오폴트의 교육열은 대단하였는데, 특히 6세 때 뮌헨으로 데려가면서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보내 여러 작곡가와 교류하고 배우게 하였다. 1763-1766까지 독일 여러 도시는 물론 파리, 런던 등을 돌며 많은 작곡가와 교류한 서유럽 일주는 모차르트에게 부담과 동시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1764년에서 1765년 사이 영국 런던에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작곡 등 배우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후 모차르트는 수차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음악을 공부하였는데, 마르티니에게서 음악이론을 배운 것을 비롯해 다양한 교향곡과 오페라를 접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와 함께 한 여행에서 만하임, 파리 등을 다니며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여러 대도시와 궁정에서 연주를 보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궁정음악가로 활동하였었으나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궁정과 여러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대주교와의 불화를 계기로 1781년 으로 떠나 이후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른다. 그곳에서 콘스탄체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 모차르트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82년 결혼을 성사시켰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에서 생활하던 1784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만났다. 그는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자신을 찾아온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이 때 베토벤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자신의 곡을 즉흥적으로 또 다른 작품으로 훌륭히 소화하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비를 일절 거절하고 베토벤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자 모차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빈을 갑작스럽게 떠났다. 만난 지 불과 한 달만의 일로 이것이 두 거장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베토벤이 다시 오스트리아 빈에 찾아온 것은 1792년의 일로 그 때는 모차르트가 죽은지 1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전거는 오토 얀이 저술한 모차르트의 전기가 유일하므로, 오늘날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만났다는 일화에 대한 신뢰성은 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죽음[편집]

    모차르트의 초상화. Johann Nepomuk della Croce의 1780년 경 작품.

    모차르트의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을 비롯하여 학설이 많다. 낭만적인 주장으로는 모차르트의 건강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의 모습과 작품들 역시 다가오는 죽음과 함께 쇠퇴하였다는 것이 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가 그에게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충격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죽음이 급작스러웠다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의 원인 또한 추측이 무성하다. 기록에는 그가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 중독, 류머티스열,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환자의 피를 뽑았던 당시의 의술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에 이바지했다고 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경에 죽었다. 아내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의 완성을 여러 제자에게 맡겼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다가 결국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완성했다.

    모차르트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흔하나, 그에게는 나름 만족할 만한 수입이 있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다. 예컨대 모차르트는 체코 프라하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꾸준한 작곡 의뢰를 받기도 했다. 그가 말년에 전성기 때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던 근거로 돈을 꿔 달라고 쓴 편지가 들리기도 하지만 또 통설에 의하면 이는 단순히 수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모차르트의 방탕함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실례로 모차르트가 입은 옷은 보석들로 치장된 화려한 의상이었으며 도박으로 돈을 낭비하기도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죽은 후 빈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다. New Groove에 따르면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묻힌 것은 사실이나 이는 가난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당시 빈의 중산층의 일반적 장례 풍습대로였다. 묘비가 나무였던 것 또한 당시 오스트리아 중산층의 흔한 장례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당시 빈에서는 화려한 장례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례식 날 비가 오고, 천둥이 쳤다고 하나 동 출처에 따르면 사실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고 한다. 현재 모차르트의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은 성 마르크스 묘지가 더 많은 묘지를 수용하기 위해 이장을 거듭하였기 때문이다. 아내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남편이 죽은 후 추모 음악회, 미발표 작품의 출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1809년 그녀는 덴마크 출신의 외교관이던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그들은 덴마크로 이주했다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여생을 마감했다. 콘스탄체와 새 남편은 모두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