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예술인중 월북을 한 케이스가 많나요?
안녕하세요. 문학/노래/미술 등 모든 예술 분야를 총망라하여 이런 예술인들중 월북을 해버린 예술가들이 있는지, 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심영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이다. 경성부 출신으로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경성제이고보 시절 무용에 관심을 가지다가 학교의 승인 없이 사회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토월회에 연구생으로 입단하면서 연극계에 입문했다.
영화배우로 먼저 데뷔하였다. 1930년에 《수일과 순애》, 《방아타령》에 차례로 출연할 것을 계기로 연극 무대에도 설 수 있게 되었다. 1932년부터 태양극장에 적을 두고 일본을 오가면서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심영은 20대 초중반인 이때 이미 연극계와 영화계에서 두루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큰데다, 성량이 우렁차고 대사 처리가 훌륭하다는 평가가 남아 있다.
동양극장의 청춘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부터는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 황철과 경쟁 관계를 형성했다. 〈춘향전〉에서 황철은 이몽룡 역을, 심영은 방자역을 맡았고,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는 심영이 주인공 홍도의 남편 역을, 황철은 홍도의 오빠 역을 맡았다.[1] 그러나 데뷔 초기의 왕성한 활동과 연기력에 대한 호평에 비해 황철의 등장 이후로는 상대적으로 활동이 위축되었고, 폐병 진단까지 받게 되었다.
1939년 극단 고협을 창설[2]했으며, 고협 등 연극 단체들이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친일 연극 단체 조선연극문화협회를 결성했을 때 이 단체의 간부를 맡았다. 고협은 태평양 전쟁 중 임선규의 〈빙하〉, 〈상아탑에서〉, 송영의 〈해당화 피는 섬〉, 김태진의 〈아름다운 고향〉 등 친일 연극을 다수 공연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연극/영화 부문에 선정되었다.
미군정 시기에는 혁명극장을 창립한 뒤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다. 1946년 3월에 우익 인사인 김두한이 심영을 습격해 테러를 가한 사건이 있었다. 심영은 이때 부인과 함께 귀가하다가 권총에 맞아 하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해방 공간에서 연극계에는 특히 월북 예술인들이 많았는데, 심영 피습 사건이 연극인 대거 월북을 불러온 원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3]
파업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1947년에는 미군정 경찰에 피검되는 등 탄압이 계속되자 월북하여 북조선 첫 극영화인 《내고향》(1949)에 출연하였다. 이후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 《정찰병》(1953), 《벗들이여 우리 함께 가자》(1960), 《두만강》(1960), 《다시 찾은 이름》(1963) 등 많은 영화에 주로 비중 있는 악역을 맡아 출연했다.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을 지냈으며, 영화제작사인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과장과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으로도 활동했다.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많은 예술인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 월북을 하게되는데 약 6-25전쟁을 전후해서 이북으로 가게 된 예술인들은 50명이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월북 예술인들로서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분들은 거의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나이로 보아서 90대가 훨씬 넘습니다. 현재 남쪽에도 전쟁전에 월북예술인들과 같이 활동하던 예술인들은 거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월북한 예술인들 중에서 임 화와 김남천, 이원조 그리고 홍명희는 68년 3월에, 이기영은 84년 8월에, 조벽암은 85년 11월에, 박태원은 86년 7월에, 조영출은 93년 5월에, 그리고 김승구는 94년 5월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태준과 김동환, 김 억, 정지용 등은 사망날짜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이광수는 평양근처 특설묘지에 묻힌 것으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