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고팔도사민이 무엇에 대한 사료인가요?
안녕하세요.
옛날 한국 역사에 있어서 '포고팔도사민'은 무엇에 대한 사료인가요?
포고팔도사민을 만든사람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포고팔도사민’은 위정척사사상의 한 일환으로, 1906년 4월 11일 최익현이 발표한 글입니다.
최익현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로, 일제 강점기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했는데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의 사상은 항일의병 무력투쟁으로 행동화되었다. 이 조약을 민족의 자존권을 박탈하는 일제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조약의 무효를 만천하에 공포할 것을 강력히 주창한 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구국제민의 실천철학으로 발전된 결과였다. 이러한 사상적 심화는 급변하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관념적인 상소운동이 아니라, 민중 속에서 위정척사를 행동화하면서 실천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역사적 상황변동에 따라 위정의 가치내용과 척사의 배척대상의 새로운 수정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70세의 고령으로도 항일의병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는,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 ·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 ·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 및 유소(遺疏) 등의 글을 통하며 애국충정을 피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이 기록처럼 당시 최익현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병오의병을 거쳐 조선 팔도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고함, 혹은 포고함 이라는 의미로, 이런 조선이라는 나라에 시급하게 위험한 위기가 닥쳤으니 의병들은 모두 힘을 모아 일본 세력을 몰아내자라는 취지의 라는 을사의병 봉기를 위해 발표한 글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최익현 입니다
최익현(1833년 ~ 1907년)은 조선후기 장령, 돈녕부도정,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항일운동가로 알려진 분입니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합니다.
수봉관·지방관·언관으로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강직성을 발휘하였습니다.
특히 1868년에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습니다. 이 상소는 최익현의 강직성과 우국애민정신의 발로이며 막혔던
언로를 연 계기가 되었습니다.
1873년에 올린 「계유상소」는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만동묘를 비롯한 서원의 철폐를 대거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상소입니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를 올려 민씨 일족의 옹폐를 비난했으나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병자지부복궐소」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킵니다.
최익현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합니다.
오랫만의 침묵을 깨고 「청토역복의제소」를 올려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이 때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각부군선유대원·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합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습니다.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하였다.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팔도사민」을 돌리고 일본 정부에 대한 문죄서 「기일본정부」를 발표하였습니다.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익현의 우국애민의 정신과 위정척사사상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1906년)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의병장이었던 최익현이 팔도( 전국) 에 있는 모든 백성( 사민) 에 포고( 알림) 다는 말 입니다. 즉, 한문을 한글로 바꾸면 < 전국 8도의 모든 백성에게 알림 > 정도가 될 것 입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8도 사민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고, 납세거부, 철도 이용거부,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1905년 6월 제자 임병찬 등 80여명과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순창에서 약 4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일군과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고 전해 집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하였습니다.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하였습니다.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팔도사민」을 돌리고 일본 정부에 대한 문죄서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를 발표하였습니다.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최익현의 우국애민의 정신과 위정척사사상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위정척사운동에 비해 최익현의 학문은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습니다.
성리학에 기본을 둔 이항로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나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형이상학보다는 애국의 실천 도덕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는 명분론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익현의 이기론은 이항로의 심전설(心專說)을 계승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최익현의 사상과 이념은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실천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구국애국 사상으로, 민족주의 사상으로 승화,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위정척사사상의 역사적 역할과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