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신라에서 왜 광개토대왕 이름이 적힌 그릇이 있나요?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니 알게 된 사실입니다.
신라 유물을 출토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그릇에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적힌 것을 발견 했다는데요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을 알고싶습니다.
전문가님 답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야 왜연합군이 신라를 침입했고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해 광개토대왕이 오만군사로 신라를 구원하고 연합군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금관가야까지 쳐들어가 정벌했는데요, 그 결과 전기가야연맹의 맹주격인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후기가야연맹은 고령지방의 대가야가 주도하게 됩니다.
이는 광개토대왕비문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신묘년조에 해당하는 기사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이 신라에서 출토되었는데 호우명그릇입니다. 왜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토기가 신라땅에서 나왔는가하면 고구려가 신라따메 주둔했기 때문입니다. 주한미군과 같은 격이라 보시면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을 맞이한 후 처음으로 일본이 아닌 한국인들의 손으로 발굴한 신라 고분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고고학은 철저하게 일본인 학자들 위주였기 때문에 광복 시점에서 한국인 중에는 전문가가 없었지요.그래서 시범적으로 호우총을 발굴한 것이라 한국 고고학사에도 의미가 크다 할수 있습니다. 신라의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금동관과 금귀고리, 목걸이, 환두대도, 토기 등과 함께 청동제 호우(그릇)가 출토되었는데 밑바닥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명칭이 새겨졌고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쓰인 정보와 일치해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교류가 생각보다 굉장히 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당 호우명 그릇에는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신라 쪽 유물 중 불교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유물이기도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의 대표적인 도시인 경주에서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 됐습니다.
신라의 고분인 호우총에서 청동기가 발견됐는데 그 바닥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신라의 도읍지에서 왜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유물이 나왔는지에 대해 학계에서는 고구려에서 만들어져 신라로 운반된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고, 그 무덤의 주인이 신라에 인질로 잡혀 온 고구려인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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