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우금령이 반포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에 소를 귀하게 여겨 우금령이 반포되었다고 하는데
어떠한 이유로 우금령이 반포되었고 언제 어떠한 이유로 폐지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우금령(牛禁令)이 초대 조선 왕인 태조로부터 23대 순조에 이르기까지 22회 발령됐다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소는 교통, 농업의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소고기를 맛보고자 하는 백성들의 욕망이 크다 보니 소를 너무 많이 도축해서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고민 했을 왕의 심사도 이해할 만합니다.
또한 소고기를 좋아한 연산군은 소고기를 일상에서도 먹을 수 있도록 우금령을 폐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우금령, 말 그대로 왕이 내린 소 도축금지령이에요. 농사가 국가적 사업이었던 조선시대. 소는 농업, 교통수단으로서 조선에 정말 중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에 소가 곧 국력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소 한마리당 사람 10명을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소가 정말 중요했겠죠? 조선시대 20년에 한번 꼴로 이루어진 우금령. 세종 7년 때는 소고기를 먹으면 태형 50대라는 처벌을 내렸다고 해요. 세종때뿐만 아니라 태종 때는 소고기를 먹은 사람을 신고할 경우, 소고기 먹은 사람의 재산을 몰수해서 신고자에게 포상으로 주었다고 해요. 소고기 한 번 먹었다고 이 정도의 벌이라니 소가 정말 중요했다는 걸 알 수 있네요. 이렇게 살벌한 벌을 주는데 조선시대 백성들이 과연 소를 먹었을까요?
앞서 말씀 드린 우금령, 처벌은 살벌했지만 그다지 잘 지켜지지는 않았고 영조 때만해도 명절에만 소가 2~3만 마리가 도축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양반, 일반 백성 가리지않고 소를 먹었으니 소고기먹기는 점점 가속화되었어요. 제사상에도 소를 올리고, 설날에도 올리고, 추석에도 올렸어요. 이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가리지 않고 먹었겠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선 후기에 소가 매일 약 1000마리씩 잡혔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인구가 1500만이라면 소는 100만마리정도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소고기를 사랑했던 연산군은 제사 때나 쓰는 소고기를 일상에서도 먹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대요. 자신이 마음껏 먹기위해 우금령을 폐지하기도 했어요.
양반들은 고기먹는 날을 따로 만들어서 소고기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간장, 계란, 파, 마늘로 양념한 소고기를 석쇠에 구워서 먹는 난로회가 양반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고 해요. 그럼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먹었을까요? 우금령인데, 힘없는 백성들은 소를 어떻게 먹을 수 있었을까요? 원래 못먹게 하면 더 먹고싶어지는게 사람 심리죠. 조선 후기의 세시풍속에 따르면 '명절이 다가오니 다리부러진 소가 많기도 하다'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이는 백성들이 소를 잡은 뒤에 소가 다리를 다쳐서 일을 못하니 잡을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을 돌려말하는 것이었어요. 이뿐만 아니라 집에 제사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소를 잡아야 겠다, 소가 병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소를 잡겠다 등의 변명이 있어요. 거짓말을 해서라도 소는 먹어야했어요. 못먹게하니 더 먹고싶다고, 우리나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먹기위해 발골기술이 발달하기도 했어요.
[출처] 전통참한우가 알려주는 한우정보_조선시대 우금령, 잘 지켜졌을까?|작성자 전통참한우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전형적인 농업 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소는 농업의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으로 소가 없을 경우 농지에서 그루갈이를 깊게 할 수 없어 소출량이 크게 줄어, 농민의 이탈 이나 농촌 사회의 불안정이 야기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가뭄이 나 홍수 등 자연 재해 대비와 함께 소의 안정적인 확보를 농사의 중요한 정책으로 여 겨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법령인 우금제도를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실록에는 우금령에 대해 기사가 전 임금 대에 걸쳐 20여 차례 언급되어 있으며, 특히 전염병인 우역이 발생했을 때는 강력한 우금 정책이 추진되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우금령이 22회 발령 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금령은 소의 도축을 금지하는 왕의 명령입니다.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농업의 주축이 되었던 소의 도살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던것 같습니다.
조선후기 소의 사육이 늘고, 농사에 쓰이는 소외에 여유가 생겼을 때 우금령은 없어지고,
하루에 1000마리 정도의 소가 도축되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소를 도축해 고기로 사용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였다.
불교국가였던 고 려와 달리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고려와 같이 모든 동물의 일괄적인 살생을
금하지는 않았으나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농작업에 필수적 인 축력을 제공하는 소는 도축을 엄격히 금지하였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근본은 농업 이였습니다. 농업국가 조선은 농업 생산력의 핵심인 농우를 지켜야 했지만 소고기의 유혹적인 맛은 범법자를 양산했다고 합니다. 우금령을 어기고 몰래 소를 도축한 이들은 엄하게 처벌했는데요. 태조는 우금령을 범한 자를 태형에 처해 도성 밖으로 쫓아냈다고 합니다. 이후의 국왕들도 엄벌을 지속했다고 하는데 관리라면 파직되거나 변방으로 내쫓겼고 백성들은 태형을 맞고 투옥됐다고 합니다. 조선 개국 초 3만 마리에 불과하던 소 사육 두수가 17세기 후반 이미 100만 마리를 넘어서는 등 농우 외에 육우의 지속적 증가 덕분에 조선말에는 명절이면 소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조선 우금령의 역사는 탐식의 욕망이 법의 금지를 이겨낸 사례라고 볼수 있으며 1대 국왕 태조로부터 23대 국왕 순조에 이르기까지 22회 발령됐다고 기록된 바 있습니다.
조선시대 우금령이란 소의 도축을 금지하라는 왕의 명령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우금령이 태조로부터 순조에 이르기까지 22회 발령되었다 기록되었다 한다.
조선이 농업국가였기 때문에 농사일에 역용우를 위해서 소의 도축을 금지했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소고기를 전혀 먹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영조 때만 해도 명절에는 2~3만 마리 정도의 소가 도축되었다.소고기를 좋아하는 연산군은 소고기를 일상에서도 먹을 수 있도록 우금령을 폐지하기도 했다.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소 사육 두수가 100만 마리가 넘어서서 농사일을 위한 역영우 외에 고기소로 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 조선 후기에는 매일 1000마리 정도의 소가 도축되었다.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금령이 반포 된 이후로는 육식을 금지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 당시만해도 농경사회가 발달이 되었기 때문에 농경을 장려 하려는 목적 때문에
반포 된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우금령(牛禁令)이 초대 조선 왕인 태조로부터 23대 순조에 이르기까지 22회 발령됐다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우금령이란 말 그대로 소의 도축을 금지하라는 왕의 명령인데요.
소의 도축을 금지하라고 왕이 지시할 정도라면 아마 소를 도축해서 먹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아마도 조선이 농업국가였기 때문에 농사일에 가장 중요한 역용우를 지켜야 하는 일이 중요했겠죠.
소고기를 맛보고자 하는 백성들의 욕망이 크다 보니 소를 너무 많이 도축해서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고민 했을 왕의 심사도 이해할 만합니다. 한편 우금령 때문에 몰래 소를 도축한 이들은 엄하게 처벌됐다고 합니다.
우금령을 위반한 백성들은 태형에 처해 투옥되고, 조정의 관리라면 파직되거나 변방으로 내쫓겼다 합니다.
조선시대에 소는 농사를 위해 정말 중요한 가축이었고 조선뿐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도 소 도축을 금하여 서양인에 비해 체구가 작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 된 후 메이지 천황이 자신도 소고기를 먹을테니 백성들도 소고기를 먹으라고 장려할 정도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소가 축산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소는 농경지를 갈고, 곡물을 운반하고, 길을 만들고, 음식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소는 귀한 동물로 여겨졌으며, 소를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우금령은 18세기 조선 후기에 발표된 법령으로, 이전에 발표된 동물보호 법령을 보완하고 강화한 것입니다. 이 법령은 소뿔과 소가죽, 소고기 등 소와 관련된 모든 것을 보호 대상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또한, 소를 해치거나 죽이는 행위는 엄격하게 처벌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우금령은 소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이는 당시 조선시대의 농업사회에서 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법령이 발표된 이후에도 소를 해치거나 죽이는 행위는 일어나기도 하였고, 이에 대한 처벌도 이루어졌습니다.
우금령은 1894년에 폐지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적인 사회 체제와는 달리, 근대적인 개혁과 변화의 기운이 느껴지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정이었습니다. 이후에는 가축에 대한 보호법이 계속 발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가축의 보호를 위한 다양한 법령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소가 농경과 군사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에 대한 예의와 풍속을 정취화한 것이 바로 '우금령'입니다. 우금령은 소에 대한 예의와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고, 농사와 농민의 생활을 보살펴주는 신입니다.
우금령이 반포된 것은 조선 성종 때인 1496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조선 왕실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유지와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에 따라 우금령이 소와 농민을 보살펴주는 신으로서 그 존재감이 커졌습니다. 이후 우금령은 농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어 대중적인 신앙 대상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우금령 신앙이 침체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변란과 선강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소와 농민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우금령도 그 중심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우금령이 정확히 언제 폐지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