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연암의 관계가 궁금해 질문드립니다
연암은 과거 급제에 통과하지 못했는데 정조의 도움으로 관직에 오르고 청나라 외교사절단에 갈 정도로 정조에게 총명받다가 열하일기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고 정조에게 미움을 받게 된것이 맞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박지원이 44세 때인 1780년 삼종형이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 진하사로 북경에 가게 되자 심부름군에 불과한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따라가 청나라 여행 중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기록한 책이 바로 우리가 잘아는 < 열하일기> 입니다. 박지원은 이 책을 통해 이용후생을 비롯한 북학파의 개혁 사상을 역설했는데요. 연암 박지원은 또 열하일기 내에 소설체로 호질과 허생전을 삽입하여 당시 사회 제도와 양반 사회의 모순을 신랄히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고 동시에 구태의연한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는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경색된 사고 방식을 풍자했다고 합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재미있는 글이였지만 정치를 하는 대신들이나 왕에게는 그리 기분좋은 글은 아니였지요. 정조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어 보고 나서 패관잡기나 명말청초(明末淸初) 중국 문인들의 문집에 영향을 받아 개성주의에 입각한 참신한 문체가 조선에서도 크게 유행한다고 판단 한 후 정조는 서양학, 패관잡기, 명말청초의 문집을 사(邪)로 규정하고, 1791년에 서학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서양학을 금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해야 하고, 패관잡기를 금하려면 먼저 명말청초 문집부터 금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문체반정의 시작인 것이지요.
계몽군주 정조답게 문체반정에 걸린 사람들에게 큰 벌은 주지 않았고 반성문 정도 쓰게 하는 것으로 대신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