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은 고려시대의 지식 대중화에 어느정도 기여했는지 궁금해요.
13세기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은 15~16세기의 유럽사회에 비하면 고려사회에서 그렇게 중대한 사회적 변화를 초래하지 못했다는데요. 궁금한게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이 그당시 지식대중화에 어느정도 기여했는지 아시는분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직지심체요절>은 승려인 '백운' 화상(和尙)이 '부처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살다 간 이름난 승려들의 말씀이나 편지 등에서 뽑은 내용을 수록해 놓은 책'입니다. 책은 본래 상하 두 권이 한 책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하권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남아 있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을 지은 사람은 '백운'이란 호를 가진 승려 '경한'입니다.
<직지심체요절>은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고려 시대에 제작되었습니다. 여주 취암사에 머물던 백운화상이란 승려가 부처님과 여러 고승들이 이야기한 법문과 게송(부처님의 공덕을 기린 노래) 가운데 좋은 부분을 뽑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란 책을 썼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이 본래 이름인가? <직지심체요절>이 본래 이름은 아닙니다. 이 책의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너무 길어서 <직지심체요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백운화상은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을 보지 못하고 1374년 여주 취암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은 3년 뒤(1377년) 백운화상의 제자인 석찬, 달잠, 묘덕 등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금속 활자로 인쇄한 것입니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란 긴 제목을 가진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직지심체'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직지심체(直指心體)란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절(要節)은 '글 가운데 꼭 필요하고 중요한 대목'이란 뜻으로, 즉 '사람이 눈을 외계로 돌리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올바로 가지면서 참선하여 도를 깨친다면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가 됨을 뜻하며, 이런 부처의 가르침을 그 중요한 대목만 뽑아 해설했다'고 해서 '요절(要節)'을 붙인 것입니다.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이며, 2001년 9월, <직지심체요절>은 전 세계에 남아있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로 여러 경전과 법문에 실린 내용 가운데 좋은 구절만 뽑아 편집한 불교 서적입니다. 백운화상이란 스님이 쓴 것을 제자 승려들이 금속 활자로 인쇄한 것으로 고려 시대 청주 흥덕사에서 발간되었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은 독일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금속 활자 기술이 서양보다 앞선 것임을 보여줍니다.
<직지심체요절>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목판으로 인쇄한 목판본이고, 다른 하나는 금속 활자로 인쇄한 금속 활자본입니다.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금속 활자본입니다. 상하 두 권이 한 책으로 이루어진 <직지심체요절> 금속 활자본은 고려 우왕 때인 1377년에 간행되었습니다.
인쇄된 이 책(금속 활자본)의 하권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한편 그의 목판본(1378년 완성)이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 동양 문헌실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직지심체요절> 금속 활자본입니다. 그리고 <직지심체요절> 목판본은 금속 활자본이 간행된 후, 1년 뒤인 1378년에 목판본 상하 양권이 경기 여주의 취암사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직지심체요절> 금속 활자본이 인쇄된 장소는 청주 흥덕사입니다. <직지심체요절> 하권 마지막 장에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인쇄했다"는 글자가 찍혀 있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이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방법으로 인쇄되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직지심체요절>이 상하 두 권 한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 보관되어 있는 목판본 책자를 통해서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전시용으로 만든 것이고, 1378년에 간행된 목판본은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상하권 1책이 각각 소장되어 있습니다.
목판본은 상하권이 완전한 1책으로 되어 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목판본만 <보물제1132호>로 1992년 4월 20일 지정되었습니다.
원래 이 책은 상하 두 권이 한 책으로 찬술한 것인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직지심체요절> 금속 활자본은 총 39장 중 제1장이 떨어져 나간채, 하권(2장부터39장까지)만이 한책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한편 우왕 4년(1378년)에 경기 여주의 취암사에서 간행한 목판본은 상하 양권이 온전하게 서울의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고려시대에 큰 혁신이었으나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제한적인 생산능력으로 인해 지식 대중화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첫째로, 고려시대는 사회적 계층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와 연관된 사상을 공부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문해력을 가진 사람들이 적어서 대중에게 글을 전파하는 것이 어려웠고, 따라서 금속활자 인쇄술이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초기의 금속활자 인쇄 기술은 아직 초기 단계였으며 매우 느렸고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책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어려웠고, 이로 인해 책의 가격이 높아 대중에게 널리 퍼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금속활자 인쇄술은 한국의 학문과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나 불교 경전의 복사에 활용되어 불교의 확산과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바로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지식의 전파와 보존에는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지식 대중화의 기반이 된 것이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야 서적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며 진정한 지식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서 청주 박물관에 있는 "직지심체요절" 이라는 세계최초의 금속 활자도 존재합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직지심체요절'은 금속활자 인쇄의 중요한 예로서 종종 언급됩니다. 이 책은 고려 시대의 불교 문화와 학문의 발전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직지심체요절'은 1231년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약 200년 이상 앞서는 것으로, 이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이용해 제작된 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의 문화와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이를 통해 고려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 기술을 도입한 국가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시기에는 아직 인쇄 기술이 초기 단계에 있어 대량 생산이 어려웠고, 사회적 계층 구조와 교육 수준 등의 이유로 지식의 대중화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 작품들은 향후 지식의 대중화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고, 고려와 이후의 조선 시대에서 보다 세련된 인쇄 기술의 발전을 이끌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