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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7.04

조선말기부터 근대식 학교가 지어졌는데 최초의 학교는 무엇인가요?

조선말기부터 근대화의 문물이 조금씩유입되어 근대식 학교가 지어졌다고 아는데요. 이런 근대학교 중 국내에 최초의 학교는 어디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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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85년 7월 미국 북감리회 소속인

    '아펜젤러'가 서소문동에 집을 한 채 사서 학교를 시작한 '배재학당'이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 그 대표적인 학자는

    오천석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은 1885년 배재학당으로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빌린 집의 방 두개를 터 교실을 만든 후 학생 두명을 데리고 첫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다음해 고종이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의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함으로써 배재학당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라 나라에서 오래 된 사립학교인 배재학당이 세워진 해는 1885년이고, 이화학당은 1886년, 경신학교 역시 1886년이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오래 전에 세워진 학교가 있다 배재학당보다 2년 먼저 세워진 원산학사가 바로 그곳이다. 말하자면 이곳이야말로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사립학교이다.


    학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학교가 문을 연 곳은 함경남도 원산이었다. 개교한 시기로 볼 때 과연 근대적인 의미의 학교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지만 그렇지가 않다. 엄연히 교사와 학생이 있었고, 유교의 경전이 아닌 신학문을 가르쳐야겠다는 이념이 분명했으며, 나름의 학칙도 만들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뒷받침을 할 수 있는 기구도 만들어놓았다.


    더구나 이 학교는 초기 사립학교가 대부분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데 반해, 전적으로 지방민들의 자력에 의해 설립된 것이어서 그 의의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


    원산학사가 문을 열게 된 것은 원산이 외국에 문호를 연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특히 일본인들이 와서 살게 되면서부터 원산주민들은 상공업 분야에서 그들에게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구의 문물을 먼저 받아들였던 일인들은 원산 사람들의 눈에는 위협적인 존재로 보여지기까지 했다.


    이에 서당을 개량하여 한문 교육만이 아닌 신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런 일을 맨 먼저 자발적으로 한 사람들은 덕원읍의 읍민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처음부터 애로점이 많았다. 교원의 확보도 그렇고, 재원도 그랬다.


    하지만 마침 정현석이 신임 덕원부사로 부임해오면서 읍민들의 계획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정현석은 개화파 인물로, 읍민들이 자치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보고 적극 권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원산 쪽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어윤중과 정헌시에게 도움을 청해 덕원부 원산에 원산학사라는 학교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관민이 힘을 합쳐 세운 학교였다. 그때가 1883년 8월 28일이었다.


    이 학교는 학칙에 정원이 50명인 문예반, 2백 명인 무예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문예반에 입학하려면 나이가 어리면서 총명한 덕원읍민의 자제여야 하고, 타지역 사람일지라도 입학금을 낼 수 있으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무예반에는 별다른 조건이 없었다. 이로 볼 때 원산학교는 요즘으로 하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정도의 교육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산학사에서 가르친 것으로는 필수과목에 산수와 과학·기계·농업·양잠·채광·일어·법률·세계역사·지리가 있었고, 전공 과목으로 문예반은 한문, 무예반은 병서와 무예가 있었다. 이는 전통의 학문을 전혀 도외시하지 않으면서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학문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교수들은 외부에서 초빙해왔다. 그러나 그 인원이 수명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 교수 1인이 여러 과목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나이나 출신 환경이 달라 자칫 무질서해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징계 조항을 두었는데, 그중에는 술집에 출입할 경우 가해지는 벌칙도 있었다.


    경비는 118명의 덕원읍민과 원산의 상인 모임, 관리들 그리고 원산 세관에 고용되어 있는 중국·미국·영국인들이 기금을 출연하여 충당했다. 원산학사에는 이 기금을 관리해서 공용 비용을 조달하도록 하는 계가 조직되어 있었다.


    원산학사는 최초로 설립된 학교인만큼 이후 세워지는 학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1895년 정부에서 신학제를 만들 때 이 학교의 선구적 역할은 어떤 형태로든 기틀이 되어주었다.


    원산은 정세 변화에 민감한 지역이었다. 그런 반응을 서당의 개량으로 나타내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곳 읍민들의 자주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원산학사는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무예반이 없어지고, 문예반만 남았다. 그리고 개교 11년째 되던 갑오개혁 때 문예반은 원산소학교가 되었다. 공립학교로 발전한 것이다.

    출처 : 한국 최초 101 장면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는 배재학당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배재학당보다 2년 앞서 원산학사가 설립된 것이 밝혀져, 원산학사가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로 일컬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