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의 대외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프랑스와 미국의 침입인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배우는데, 이 두 사건이 이후 조선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들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권기헌 전문가입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모두 서양에서 무력으로 소란을 일으킨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병인양요는 병인박해 등을 구실로 전투가 일어났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흥선대원군의 부친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함으로써 조선인의 입장에서 천인공노할 짓을 했기에 쇄국정책에 영향을 주었으며, 신미양요에서는 분명히 조선군이 상당한 피해를 보았음에도 오히려 더 강력하게 나오자 일단 미국이 협상이 불가할 것으로 판단하여 물러나니 조선은 승리했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올라서 쇄국정책을 의미하는 척화비를 세우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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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택된 답변
  •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은 조선이 서양 열강과 처음으로 치른 무력 충돌입니다. 병인양요는 병인박해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양헌수, 한성근의 활약으로 프랑스 군대는 1개월만에 패퇴하였습니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보복을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입니다. 압도적 화력을 앞세워 조선군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어재연 등의 활약으로 물러났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은 통상 요구를 거부하자 서양 열강들이 침략한 사례입니다. 이를 계기로 조선 조정과 백성들의 배외 의식이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또한 대원군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건립하여 통상 거부 의지를 지속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