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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

광동 진씨는 어떻게 해서 조선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나요?

광동 진씨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수병을 끌고 도움을 주러온 명나라 장수 진린의 성인걸로 알고 있는데요.

진린이 전쟁이 끝나고 조선에 정착했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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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
      흔하지 않은 성씨로

      명나라 진린도독장군의 손자 진석문께서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면서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리로

      망명와 자손을 번창시킴. 황조리에 시조 사당이 있음.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조 : 진린(陳璘)

      시조는 진린(陳璘, 천린, 1543년~1607년)은 중국 광동 지방에서 진본림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자는 조작(朝爵)이고 호는 용애(龍厓)이다. 대대로 현유와 현관을 배출한 명문의 후손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 조선이 위태롭게 되자 명나라 어위도총관,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으로서 수병 5천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다.


      처음에는 이순신(李舜臣)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세운 전공을 진린에게 양보하는 등 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자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하여 진정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하여 만력제(萬曆帝)가 이순신에게 8가지 선물들을 보내도록 하는 데 일조를 했다. 전란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사망한 뒤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되었다.


      그의 손자 진영소(陳泳溸)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남경(난징)에서 배를 타고 남해의 장승포에 표착하였다. 그러다가 할아버지인 진린(陳璘)이 공을 세웠던 강진 고금도로 옮겨 살다가 다시 해남현 내해리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는데 여기서부터 광동진씨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현재도 진린의 태생지인 광동성 소관시 옹원현(翁源縣) 주파진에 있는 문중과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해남의 황조마을 후손들은 2년에 한 번씩 한식날엔 본토 진씨들이 제사에 참석하며 혈육의 정을 나누고 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조 진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명나라 수군 제독으로서 조선과 연합하여 일본을 물리치고 전공을 세웠으며 진린의 손자 진영소가 명나라에서 감국수위사를 지내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 된 후 조선으로 동래하여 전라도 남해의 장승포에 표착하였다가 전라도 강진군 고금도로 옮겨 살았고 그후 다시 전라도 해남현 내해리로 이거하여 정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