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는 어떤 의미를 갖는 역사유적지 인가요?
문경새재에서 항상 10월이 되면
문경 사과 축제가 진행됩니다
문경새재를 걸으면 자연 풍경도 좋고 평지라서
걷기 매우 좋은데요
문경새재는 어떤 억사적 의미를 갖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경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문경새재도립공원에 있는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재입니다.
1974년에 지방기념물 제18호, 1981년 6월 4일에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지난 1999년부터 학술연구용역 및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체계적으로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고 2007년 10월 18일 개장했습니다.
그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로부터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문경새재 길은 부산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최단거리였습니다. 특히, 영남지방의 선비들은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질까봐,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질까봐 가지 않고, 문경새재를 통해서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뒤에 제 1관문 주흘관, 제 2관문 조곡관, 제 3관문 조령관의 3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습니다.
관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출장을 가는 관리들에게 숙·식·의를 제공했던 조령원터, 도적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는 사람들을 덮쳤다는 마당바위, 조선시대 구 경상감사가 신 감사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해주던 교귀정이 있습니다. 또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산불조심(산불조심)’이 적힌 표지석도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고어로 된 한글 비석 4점 가운데 국한문 혼용이 아닌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경새재는 삼국시대 때 신라 초기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을 막는 국경선이었고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충주 탄금대가 아닌 이곳에서 결진해 매복했다면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더 효과적으로 막았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중추로 추풍령, 죽령과 함께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잇는 가장 중요한 경로였으며, 전근대 시절 죽령은 자체가 험한데다 단양의 남한강 협곡으로 한산했고, 추풍령은 우회길이며 옥천과 영동사이에 있는 금강의 협곡들로 각광을 받지 못했으나 조령은 고개가 험한 것을 빼면 한성과 경상도를 직선거리에 가깝게 이었고 협곡과 같은 방해물이 적어 청주에서 회인과 보은을 거쳐 상주로 가는 고개인 화령과 함께 주요 고개로 이용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일대의 새재를 중심으로 지정된 도립공원입니다. 1981년 6월 4일 경상북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문경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경새재는 대한민국의 명승으로 부산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최단거리였고 영남지방 선비들이 문경새재를 통하여 과거시험을 보러갔었다고 하며 조선시댇 옛길을 대표한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경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다. 이 때문에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 국방의 요충지역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초기에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을 막는 국경선이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주흘관(主屹關), 조곡관(鳥谷關), 조령관(鳥嶺關) 등 3개의 관문(사적 제 147호)이 설치되어 국방의 요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