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고려 거란 전쟁에서 강감찬의 최후의 모습은 어땟나요?
고려 영웅 강감찬의 삶과 그의 마지막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또한 강감찬의 후손 중 유명한 분이 계셨는지도 궁금하네요. 답글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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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강감찬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게 하는 등의 특전을 베풀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로 봉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삼았다. 1020년(현종 11)에 강감찬은 다시 사직을 청하였고, 이에 현종은 사직을 허락하며 그를 특진검교태부(特進檢校太傅)·천수현개국자(天水縣開國子)·식읍오백호(食邑五百戶)로 올려주었다.
그러나 사직 후에도 정치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강감찬은 개경에 성곽이 없으니 나성(羅城) 을 쌓자고 건의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030년(현종 21)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덕종[고려](德宗) 은 강감찬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으로 삼고 특진검교태사(特進檢校太師)·시중(侍中)·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식읍일천호(食邑一千戶)로 올려주었다. 얼마 뒤에 그가 84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회를 3일간 정지하고 백관에게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뒤에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아들은 강행경(姜行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