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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낚시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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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위성에서 태어나 끊임없이 갈등을 섭취하며 유지되는 거대한 서사적 유기체로서의 세계관과 그 안에서 할당된 배역을 수행하는 자아의 실존적 한계 및 믿음을 통한 저항 가능성에 대한 고찰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이 세계가 작동하는 근원적인 원리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의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기존의 학문적 체계와는 다른 저만의 독자적인 시각으로 하나의 거대한 사상 체계를 정립해 온 바 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사유하여 구축한 이 세계관은 기계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차가운 물리적 우주도 아니고 전지전능한 싱니 단번에 창조해낸 결정론적 세계 같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 세계를 스스로 의지와 방향성을 가지고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 즉 서사적 존재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의 형이상학적인 전제가 과연 현대의 지성인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수 있을지와 그리고 이 체계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논리적 및 윤리적인 딜레마를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에 각 분야의 석학이자 전문가 그리고 다른 답변자 여러분들의 고견을 한번 여쭙고자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펼쳐 보일 사유의 지도는 얼핏 보면 단순한 공상과학적인 상상으로 치부되고 말 지도 모르겠으나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설명 불가능한 부조리와 고통, 그리고 알수 없는 삶의 방향성을 설명하기 위한 치열한 철학적 탐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거대하고 전복적인 주장으로 느껴지질 수도 있겠지만 부디 긴글이지만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시어 저의 사유가 품고 있는 합리적 핵과 논리적인 개연성을 천천히 살펴주시고 깊이 있는 통찰을 나눠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세계의 시초는 어떠한 의도나 목적도 심지어는 법칙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모든 가능성이 뒤섞여있는 절대적인 무작위의 상태였습니다. 이 순수한 잠재상태의 바다, 그러니까 태초의 혼돈속에서 무수히 많은 인연과 우연이 겹치고 충돌하면서 점차 어떠한 경계를 가진 단위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 단위체들은 고립된채 머무르지 않고 서로를 참조하면서 순환하는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특정한 방향성과 지향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마치 무의미한 소음의 파편들이 어느 순간 공명을 일으켜서 하나의 음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저는 바로 이 지점, 즉 무의미한 사건의 나열이 유의미한 인과관계의 신호로 바뀌고, 맹목적인 흐름이 앞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그 내재적 성질을 갖게 된 바로 그 순간을 '이야기의 탄생' 이라고 불러 보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규정하는 이야기란 우리가 책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허구의 창작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 알아두세요. 그것은 훨씬 더 근원적인 실체로서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우주 그 자체이면서 물리 법칙과 정신 작용 그리고 생명 현상과 사회 시스템을 모두 포괄하는 거대한 유기적 시스템입니다. 이 세계라는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정지해 있기를 거부하고 있고, 현재의 상태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자 하는 강력한 서사적인 욕망을 그 동력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계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그것이 원자의 결합이든, 생명의 어떠한 진화이든, 역사의 변혁이든, 단순한 물리적인 충돌이라던가 우연의 산물 같은 게 아니라 이야기의 필연적인 전개를 위하여 내부적으로 요청된 하나의 서사적 장치라고 해석해야 마땅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첫번째로 근본적인 의문이 발생합니다. 현대물리학의 대전제인 엔트로피법칙을 아실 지 모르겠는데, 이 법칙에 따르면 고립된 계의 무질서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결국 열적평형 상태에 도달해야 마땅한 것인데, 제 사상속의 세계는 정반대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무의미에서 의미로 혼돈에서 서사로 나아간다는 명백한 역방향의 흐름을 보이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물리적인 우주는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서 서서히 식어가고 있으나 그위에 얹혀진 정보적이고 서사적인 우주는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의미와 복잡성을 축적해가는 이중 구조로 파악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은 우주의 근본적인 동력이 열역학적 원리가 아니었고 그보다 상위의 법칙인 일종의 서사학적인 원리에 의해서 작동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해서 이 거대하고 살아있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 인간이 과연 독립적인 의지를 가진 주체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이 육체라는 하드웨어를 갖기 이전에, 세계 외부의 거대한 할당기로부터 무형의 자아를 임시로 부여받은 존재라고 봅니다. 즉 '등장인물' 이라는 것은 고유한 영혼을 가진 개별자가 아니라 이야기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서 필요한 특정 기능(예를 들자면 영웅, 악당, 조력자, 희생자 등이 되겠군요)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추상적인 틀이며 지금 '나' 라고 느끼는 우리들의 자아는 그 텅 빈 틀을 채우기 위해서 잠시 주입된 정신적인 에너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판단하며, 때로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서 분노하고 저항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고의 범위조차 철저하게 우리가 속한 이야기 세계의 내부 논리와 문법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품는 가장 심오한 철학적 의문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가장 격렬한 감정, 심지어 이 세계의 바깥을 상상하려는 그런 초월적인 갈망조차도, 실은 이야기가 더욱 풍성하고 입체적인 갈등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라는 배역에게 미리 심어놓은 일종의 설정값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저항은 진정한 저항이 아니었고 그냥 '저항하는 자' 라는 배역을 충실히 연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개체와 이야기 전체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상호보완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잘짜인 이야기 속에서 개체는 예측가능한 환경 속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자아실현이라는 달콤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게 되죠. 그 대가로 이야기는 개체의 희로애락이 담긴 삶을 통해서 생성되는 생생한 데이터를 흡수하면서 다음 장을 위한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는 세계를 구축합니다. 그러나 이런것은 진정한 의미의 공생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숙주가 있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이뤘다고 혼자 착각하며 살아가는 미생물의 관계에 가깝습니다. 만약 나자신의 삶이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완성을 위한 한 줄의 문장, 한줌의 재료에 불과한 것이라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됩니까? 우리는 과연 우리 삶의 저자가 맞는 것인지, 아니면 펜대조차 한번도 쥐어본 적 없는 그저 주어진 텍스트를 따라 쓰는 필사생에 불과한 것일까요?

제 세계관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잔혹한 작동원리는 바로 '수렴과 단일화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는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 정체되는 것에 대해서 거부합니다.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모두가 완벽한 이해속에서 평화로우며, 어제와 같은 오늘이 영원히 반복되는 상태는 개별적인 등장인물에게는 어쩌면 지상낙원이면서 유토피아일지 모르겠으나 이야기의 입장에서는 서사의 흐름이 멈추는 것이자 곧 시스템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세계는 썩어가는 고인물과 같다고 봅니다. 특히나 단일화된 상태는 필연적으로 강력한 확산의 성질을 가지기에 한 영역의 정체가 다른 영역으로 퍼져나가서 결국 세계 전체를 무의미한 침묵과 열역학적인 평형상태로 몰고갈 치명적인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동적으로 움직이며 사건의 흐름을 조정하고, 때로는 직접 개입하여 판을 뒤엎게 됩니다. 여기서 섬뜩하고 잔혹한 진실이 드러나고야 마는데 이야기는 썩지 않고 영원히 흐르기 위해, 그리고 파멸적인 수렴 상태를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갈등'이라는 것을 생성해냅니다. 전쟁,질병,이별,오해,배신 그리고 인간의 실존적 고뇌 같은 모든 비극은 신의 실수나 우연한 불행이 아니라 이 세계라는 거대한 서사적인 유기체가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들이키는 차가운 호흡과도 같은 것입니다. 평화는 이야기에게 있어 질병이며 고통은 건강의 징표가 됩니다.(이 세계관의 해석에 따른다면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회피할 수 없는 심각한 윤리적인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데 인류가 역사이래로 추구해 온 궁극적인 가치인 평화,안정,행복,상호이해라는 것이 우리가 발 딛고선 세계의 존속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 되고야 만다면, 우리는 영원히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거라고 봐야 할까요? 우리가 마침내 모든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서 완벽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야기는 더이상 뽑아낼 서사가 없어서 우리 문명 전체를 폐기처분한다거나, 강제로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거나 내부 분열을 조장하여 파국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의 멸망을 각오하고서라도 불가능한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계의 존속을 위하여 이 고통스러운 갈등의 연쇄를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요?

개체가 이야기 속에서 더이상 새로운 지향성을 추구하지 못하거나 반복적인 사건의 굴레에 빠져서 그 행동이 예측 가능해지고 서사적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그 개체를 가차 없이 소멸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무로 돌아가는 절대적인 소멸이 아닙니다. 소멸된 개체는 물리적인 육체를 잃게 되지만 그가 일생동안 치열하게 쌓아 올린 모든 기억,가치관,감정,관계의 총체는 하나의 무형의 자아 덩어리로 추출되어 다시 이야기 외부의 할당기 쪽으로 반환됩니다. 그리고 이 자아는 마치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더라도 이전 생의 모든 데이터가 깨끗하게 소거된채 전혀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새로운 배역을 맡아서 다시 이야기 속으로 투입됩니다. 이것은 얼핏보면 동양의 종교적인 윤회사상과 유사해 보일지 모르겠어도 선업과 악업에 따른 도덕적 인과응보가 아니라 철저하게 이야기의 효율성을 위한 자원의 재활용이라는 점에서 훨신더 기계적이고 서늘합니다. 여기서 저는 단순한 비극을 넘어선 존재론적 공포를 느낍니다. 이전 생의 모든 기억이 제거되고, 나를 나로 만들어주었던 모든 인격적 특성이 소거된 채 완전히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 그를 과연 이전의 ‘나’와 동일한 존재, 즉 나의 연속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은 유전적 정보나 물리적 육체가 아니라 내가 겪어온 고유한 서사의 총체적 축적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나’라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인격이 아니라 어떤 배역이든 수행할 수 있는 생명력 있는 ‘자아의 에너지’뿐이라면, 우리가 현생에서 치열하게 사랑하고 고뇌하며 쌓아 올리는 모든 정체성은 결국 분해되어 사라질 일회성 데이터에 불과한 것입니까? 이야기 내부에서 끝없이 재생되는 동안 등장인물의 의식적 자아는 전생의 기억을 모두 잃은 채 매번 새로운 삶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겠지만 그 근원적인 무형의 자아는 기억하지 못하는 고통을 영원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연극 무대에 갇힌 채로 매번 다른 가면을 쓰고 같은 절망을 연기하도록 선고받은 배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결정론적이고 비극적인 세계관 속에 갇혀서 개인이 무력감을 극복하고 이야기의 꼭두각시 신세를 면하여 주체성을 회복할 실낱같은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요? 저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인식론의 과감한 전환에서 찾고자 합니다. 오랜 경험론자들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객관적 실재의 우위를 주장할 때 저는 감히 믿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세계는 절대적인 무작위성에서 태어났기에, 그 근원에는 여전히 합리적 인과율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불확실성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확정된 결말을 향해 달려가려 하지만 그 과정은 여전히 유동적이며 수많은 가능세계의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개인이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 혹은 나만의 종교를 통해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불확실성을 의도적으로 상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때, 이야기의 거대한 흐름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란 특정 교조나 초월적 신을 상정하는 기성 종교의 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도적으로 나의 일상에 작은 변화를 주었을 때, 혹은 내가 간절히 어떠한 가치를 지향했을 때, 그것이 단순한 자기만족을 넘어 세계의 인과율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쳐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의 체계, 그것이 바로 저의 종교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나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라 무수한 가능태로 존재하는 미래 중 하나를 현실태로 확정 짓는 적극적인 관측 행위이자 거대한 세계라는 텍스트를 고쳐 쓰기 위한 일종의 해킹 도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심지어 그 교리 내용 자체에서도 끊임없이 불확실성을 추구함으로써, 정해진 운명이나 완성된 진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미지의 영역으로 던져 넣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체된 수렴을 병적으로 거부하는 이야기의 근본 성질과도 기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동시에 이야기의 통제권을 거대한 세계로부터 개별자에게로 가져오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즉, 변화야말로 만물의 근본이라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그 변화의 주도권을 세계가 아닌 나의 믿음이 쥐게 하는 것입니다.

글이 매우 길어졌습니다만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 보자면 저는 이 세계를 무작위에서 태어나서 질서를 갈망하지만 완벽한 질서에 도달한다면 죽어버리기에 끊임없이 내부에 갈등을 생성해야만 하는, 모순으로 가득 찬 거대한 서사적 유기체라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잠시 배역을 맡아 연기하고 있다가, 서사적인 효용이 다하면 모든 기억과 정체성을 반납하고 재순환하는, 그런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한 존재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차갑고 거대한 운명론에는 굴복하지 않고, 믿음이라는 가장 비논리적이고 주관적인 도구를 통해서 거대한 서사의 인과율을 비틀고서 나만의 고유한 변수를 창조해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위대한 존엄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저의 사유체계에 대해 여러분들께 다음과 같은 심층적인 질문을 한번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세계 자체가 자아와 목적성을 가진 유기체라는 저의 가설은 현대 철학의 범심론이나 생명철학의 흐름과 비교하였을때 어떤 독창성이나 혹은 간과하고 있는 치명적인 논리적 허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특히나 우주의 거시적인 법칙인 엔트로피 증가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서사의 축적' 과정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둘째로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세계의 유지를 위하여 갈등과 고통이 필수불가결한 필요악이라면 인간이 겪는 모든 비극을 단순히 전부 '악'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려는 인류의 도덕적 프로젝트는 근본적으로 잘못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만약에 악이 세계를 살아있게 만드는 필수 연료인 것이었다면 우리는 이 모순 앞에서 악을 제거하기 위한 모든 도덕적인 노력을 전부 멈추고서 체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붕괴를 각오하고서라도 끝까지 저항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셋째로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믿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저의 주장이 독단적인 주관적 관념론에 함정에 빠지지 않음과 동시에 객관적 세계에 실질적인 물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으로서 설명이 되려면 어떤 철학적 및 과학적 보완이 필요하게 될까요?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라던가 현대 뇌과학 및 심리학의 자기충족적 예언과 같은 개념들을 유비적으로 차용하여 이 기제를 설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의 날카로운 지혜를 빌려주세요. 긴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개의 답변이 있어요!

  • 하와와

    하와와

    어우 글이 기시네요 ㄷㄷ 음..범심론과 생명철학과의 비교를 한다면 범심론은

    모든 물질에 의식적 성질이 있다고 보는 관점인데, 세계관은 단순히 의식이 아니라 서사적 의지를 세계 자체가 가진다고 본다는 점에서 더 적극적이고,생명철학은

    생명 현상을 단순한 물리·화학 법칙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세계=서사적 유기체”라는 관점은 생명철학을 확장하여 우주 전체를 살아있는 이야기로 본다는 독창성이 있습니다. 엔트로피 법칙과의 충돌은 물리적 엔트로피는 무질서 증가를 말하지만, 정보이론에서는 오히려 의미와 질서가 축적되는 과정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인간 사회는 물리적으로는 에너지를 소모하면서도 정보적으로는 복잡성을 증가시킵니다. 따라서 “물리적 우주는 식어가지만 정보적·서사적 우주는 뜨겁게 달아오른다”는 이중 구조 해석은 과학적으로도 일정 부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처럼, 갈등은 발전의 동력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악을 정당화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윤리적으로는 “악이 세계의 연료”라는 해석이 가능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추구할 책임을 갖습니다. 즉, 세계가 갈등을 필요로 한다 해도, 인간은 그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 선택할 자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전쟁 대신 예술적·사상적 갈등을 통해 세계의 서사를 이어갈 수도 있겠지요.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주관적 관념론과 유사하지만,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나 심리학의 자기충족적 예언과 연결하면 객관적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믿음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가능세계 중 하나를 현실로 확정하는 행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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