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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23.03.21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해석은 어떻게 되나요?

과거 우리의 역사 중에 큰 영토를 차지한 고구려, 그 고구려의 전성기가 장수왕 때라고 알고 있는데,

장수왕의 시기가 전성기가 되기 위해서 광개토대왕의 많은 업적이 있어서 일거라 생각이 드네요,

광개토대왕비를 장수왕 때 세웠다고 하던데, 이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의 해석이 어떻게 되는지 궁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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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보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개토대왕비 해석은 길기 때문에 퍼왔습니다.

    옛적에 시조(始祖)이신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우셨는데 (왕께서는) 북부여에서 나오신[16][17] 천제(天帝)의 아드님이었고 어머니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德)이 있었다. ▨▨▨▨▨ 말을 타고 순행하시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께서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를 물에 띄우라."라고 하셨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면서[18] 몸을 돌려서 세자(世子)였던 유류(儒留)를 왕(王)으로 명하고서 "도(道)로써 흥치(興治)하라." 하시니라.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이 하늘(皇天)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주고자 한다. 그 말씀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19]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395년)[20]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21]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00 ~ 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가 신묘년(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에 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셨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22] 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23],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24]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하였다. 이때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백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했다.

    영락 9년(399년) 기해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와 화통하였다.[25]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었습니다. 노객(奴客)[26]은 (대왕의) 민(民)[27][28]으로서 대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였다.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男居城)에서부터 신라성(新羅城)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왜군이 가득하였지만,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그래서 라인(羅人)을 수병(戍兵)으로 두셨다.[29]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 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 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30]

    14년(404년) 갑진에 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연선(連船)[31]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출신지와 호수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民은 4가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 자련(訾連)의 2가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穢)(의 연호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무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 왕들이 오직 원근(遠近)[32]에 사는 구민(舊民)들[33]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韓)과 (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이고 간연(看烟)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선조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출처 -나무 위키

    광개토대왕릉비 - 나무위키 (namu.wiki)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개토대왕의 비의 내용에 대하여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058

    광개토대왕의 비에 대한 해석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90164.html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고구려의 왕 광개토대왕이 작성한 시문으로, 당시의 동북아시아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비문은 414년에 작성되었으며, 광개토대왕이 자신의 업적과 이념을 기록한 것입니다.


    비문 전체는 14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天命之節 어디서든지 하늘의 뜻이 보이는 계절

    不以人의道 누구의 궁리나 사람의 뜻과는 무관하다

    天道無親 자비로운 하늘이 없다

    常以眞理 不以人情 항상 진리를 따르고 사람의 마음을 따르지 않는다"


    이 비문은 광개토대왕이 하늘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오른 것을 강조하며, 인간의 뜻과는 별개로 하늘의 이끔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따라 진리와 공정함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이념은 당시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유류왕(儒留王)과 대주류왕(大朱留王)을 거쳐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즉 광개토왕으로 왕실의 계보가

    이어졌다는 점, 그리고 광개토왕의

    생전 업적에 대한 찬양과 더불어 갑인년(甲寅年)인 414년 9월 19일에 왕이

    승하한 뒤 시신을 왕릉으로 옮기면서

    비를 세워 왕의 공적을 적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안녕하세요. 한도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아주 중요한 문화 유산이죠..^^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덟가지 모로 된 비가 쌓이고, 아홉 개의 물결이 일어나며, 바람이 세차게 분다. 찬란한 달이 떠오르고, 하늘에 수많은 별이 빛난다. 그 빛이 나의 길을 비추어주니, 나는 외로움 없이 가렵니다.

    이 비문은 자연현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가 쌓이는 것은 지식과 경험이 쌓이는 것을 나타내며, 물결이 일어나는 것은 인생의 변화와 어려움을 나타냅니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는 것은 시련과 고난을 겪는 것을 나타내며, 찬란한 달과 수많은 별은 지혜와 영감을 상징합니다. 마지막으로, 빛이 나의 길을 비추어주니 외로움 없이 가는 것은 지혜와 영감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은 마모, 멸실, 훼손으로 판독이 불가하나 신라를 구하고 임나가라 정벌을 완수한 후 점령지역 안정을 위한 행위들을 기재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훼손된 부분을 제외하고 해석한 내용으로는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려우셨다. 00000명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태녀가다가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서 말씀하셨다. '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을 떠올라라. ' 이 말씀에 따라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왕위에 낙이 없자 사신을 보내시니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에 서서 승천하셨다. 세자로서 고명을 이어받은 유류왕은 도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단단히 하셨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열여덟살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이라 하셨다. 은택은 하늘까지 적시고 위무는 온 세상에 떨치셨다. 00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그 생업을 평안히 하였다.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윤택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않아 서른아홉살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셨다. 갑인년 9월 29일 을유일에 산릉에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우고 훈적을 기록해 후세에 알리고자 한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395년 기사: 영락 5년 때는 을미년이었다. 왕은 패려가 사람들을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자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토벌하였다. 부산, 부산을 지나 염수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700개 영을 격파하고 노획한 소와 말, 양떼의 수가 헤아릴수없이 많았다. 이에 왕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0성, 역성, 북풍, 오비0에 오면서 국경을 두루 살피며 사냥하고 돌아왔다.

    백잔, 신라는 과거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었다.

    396년 기사: 영락 6년 병신년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였다. 군은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00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0사조성, 아단성, 고리성,0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0000성, 0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00성, 두노성, 비00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000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증0성, 00노성, 구천성 등을 공취하고 그 도성에 다다랐다. 백잔은 의에 복종치 않고 감히 전투에 나섰다. 왕이 매우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군사를 보내 성을 공격하였고 소굴로 도망쳐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쳐 항복하고 스스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노객이 되겠습니다.' 라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은 은혜로이 용서하고 뒤에 순종한 정성은 기특하게 여겼다. 이때 58개성, 7백개 촌을 얻었고, 백잔주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도성으로 개선했다.

    398년 기사: 영락 8년 무술년, 한 부대의 군사를 보내 식신 토곡을 순찰하도록했다. 이때 막0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3백여명을 잡아왔다. 이때부터 조공하고 내부의 일을 여쭈었다.

    399년 기사: 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을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400년 기사: 영락 10년 경자년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퇴각하여 그 뒤를 지체없이 쫖아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0성을 차지하고 왜구가 크게 무너지니 성.... 신라인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과거 신라의 매금은 직접 와서 여쭈지 않았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조공하였다.

    404년 기사 영락 14년 갑진년, 그럼에도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 연안을 침입하였다. 석성을 공격하고 연선을 .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평양을 거쳐 00에서 선봉이 서로 맞서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에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고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다.

    407년 기사: 영락 17년 정미년, 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출병시켰다. 00000000 왕의 군대를 사방 포위작전을 펴서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갑옥이 1만여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루성, 0주성, 0성, 000000성을 격파하였다.

    410년 기사: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옜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군이 여성에 이르자 동부여는 나라 전체가 두려워하며 , 왕의 은덕이 전체에 두루 미치게 되자 돌아왔다. 또 이때 왕의 교화를 사모하려 관군을 따라 온 자는 미구루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000압록였다. 대체로 헤아려조니 공파 한 성이 64개, 촌이 1천 400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