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흠돌의 모반사건에 대해 질문합니다.
김흠돌의 모반사건에서 신문왕이 교서를 보냈는데요
신문왕이 보낸 교서의 내용이 궁금합니다.
어떠한 내용을 가진 교서였는지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사의 숙청왕으로 신문왕이 있다. 기나긴 삼국통일전쟁, 나당전쟁을 거치며 이전의 신라와 완전히 달라진 통일신라에는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전쟁공신이 가득했고, 훗날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이방원처럼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전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 문무왕의 관 앞에서 유조에 따라 곧바로 즉위한 지 1개월 뒤인 681년 8월, 신문왕은 삼국통일전쟁 때 김유신 휘하에서 종군하며 많은 공을 세운 장군 김군관을 상대등에서 해임하여 병부령으로 강등시켰고 각간 진복을 상대등에 임명한다. 김군관은 백제, 고구려 공격은 물론 나당전쟁 때도 종군한 백전노장이었는데 그를 이렇게 강등시킨 것은 통일전쟁을 통해 거대해진 무관 진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이윽고 며칠 지나지 않은 8월 8일에 바로 신문왕의 장인이기도 한 잡찬 김흠돌(金欽突), 파진찬 김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의 모반 사건이 있었다. 김흠돌 역시 김군관처럼 삼국통일전쟁에 상당한 군공을 세웠으며, 자신의 딸을 당시 태자였던 신문왕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면 상당한 위세를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김흠돌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김군관 강등으로 김흠돌 세력이 도모하던 역모가 사실상 세상에 드러나자 김흠돌은 준비기간을 일주일도 갖지 못하고 서둘러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신문왕은 이미 예상했던지 준비한 진압군을 이끌고 반군을 격파하여 진압한다. 이에 반군의 일부는 대궐 뜰에서 항복하고 일부는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었다. 아직 상복도 벗지 않은 시점에 일어난 반란에 신문왕은 분노해 반란세력을 철저히 추적했는데, 산으로 도망간 잔당은 3~4일에 걸쳐 샅샅이 추적해 모두 주살했다. 이 사건으로 파진찬 김흥원, 대아찬 진공을 비롯한 상당수 귀족들을 숙청하였다. 잔당 소탕을 완료한 후 8월 16일에는 교서를 내린다.그리고 원래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도 아비의 모반죄에 엮어 궁에서 쫓아내버리고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를 후처로 들였다. 신문왕의 후계자인 효소왕과 성덕왕은 모두 그녀의 소생이다.
김흠돌의 모반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다. 김군관과 김흠돌이 긴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김군관이 강등되자 김흠돌이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딸이 신문왕의 비였지만 소생이 없었던 것도 그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김흠돌은 어차피 왕의 장인이었던만큼 굳이 모반을 꾀할 정도로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었으며 오히려 이 사건은 신문왕이나 그 수하가 조작한 친위 쿠데타였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로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다는 해석이 통설이지만,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출처: 나무위키 김흠돌의 난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흠돌은 문무왕(文武王) 원년(661) 중국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대당(大幢) 군단이 동원되었을 때 그 장군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문무왕 8년(668)에는 대아찬으로서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대고구려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삼국사기』 신문왕(神文王) 즉위년(681) 조에 따르면, 신문왕이 태자로 있을 때 김흠돌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신문왕이 태자로 봉해진 때가 문무왕 5년(665)이므로, 김흠돌이 대아찬으로서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임명된 다음입니다. 이 시기 태자의 장인이 될 정도로 중앙 정치와 군사 분야의 유력자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문왕 원년(681) 8월 8일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함께 반란을 꾀하였다가 신문왕 1년(681)에 처형되었습니다.
반란을 진압한 뒤 신문왕이 내린 교서를 보면, 김흠돌 등이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국왕이 은전을 베풀어 승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세를 부리고 탐욕스러웠다고 하였습니다. 나당전쟁을 거치면서 진골 출신 고위 관료들이 친당파라는 이유 등으로 숙청되었으며, 이로 인해 진골 귀족과 왕권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김흠돌의 경우는 자신의 딸이 태자비가 되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자 국왕 인척으로서의 지위가 유지되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반란을 주도하였다고 보입니다.
반란이 실패함으로써 신문왕비는 출궁되었고, 반란 가담자들은 모두 처형당하였습니다. 병부령으로 있던 이찬 김군관(金軍官)은 김흠돌의 난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반란의 계획을 알고 고발하지 않았다는 불고지죄를 물어 그의 아들과 함께 자결하게 하였습니다. 신문왕은 이처럼 철저한 응징을 통해 중대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