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때 일어난 신임사화는 무엇인가요?
경종때 신임사화가 일어났다고 알고 있는데요.
신임사화는 어떠한 사건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어떠한 이유 때문에 발생을 했는지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임사화(辛壬士禍)는 신축년(辛丑年)과 임인년(壬寅年)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 하며, 임인년에 주로 일어났으므로 '임인옥'이라고도 합니다.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건이며,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발생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21년(경종 1)~1722년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사건을 말하며 이미 숙종대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하여 사문시비를 벌였으나 경종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시비로 논지가 바뀌었습니다. 신임사화라는 용어는 당대부터 쓰였으나, 화를 입은 노론측의 입장이 반영된 용어로써 노소론 사이의 대립에 왕통문제가 개입된 것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세자로 책봉되고 뒤에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임사화는 1721년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사류들의 참변을 말합니다.
이 사건은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 입니다.
숙종 말년 소론은 세자인 균을 지지,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 합니다.
경종은 세자 때에 생모인 장희빈이 죽자 이상스러운 병의 징후가 나타났으므로 숙종은 이를 매우 걱정합니다.
한편 숙종은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 정권이 실권을 잡은 이듬해 이이명을 불러 소위 정유독대를 하며 이로써 소론은 경종 보호의 명분을 더 확고히 하고자 합니다. 반면 노론은 연잉군 추대의 의리로 맞서 이후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경종은 성격이 온유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정언 이정소의 상소를 시발로 노른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도 연잉군의 책봉을 주장합니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년 8월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 그러자 소론의 행사직 유봉휘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우의정 조태구도 그를 비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또한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달 뒤인 10월 집의 조성복의 상소로 세제청정을 요구, 이에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간의 논쟁도 치열했습니다.
경종의 질환을 이유로 하여 경종 즉위년부터 세제 책봉과 세제 대리청정 문제를 서둘렀으므로 그것을 쟁점으로 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첨예화되었고 이떄 소론에 대한 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1721년 12월 소론의 과격파인 사직 김일경을 우두머리고 한 7인이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고, 이 상소로 인해 병신처분 이래 구축된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이 단행됩니다.
이에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 이건명은 나로도에 안치, 그 박에 여러 노론들도 삭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 됩니다.
한편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이 임명되면서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히나 소론 측에서도 김일경의 인물됨을 경계해 노론 숙청에 온건적 입장을 취하는 조태구, 최석항 일파는 완소, 강경론자인 김일경 일파를 준소라 합니다.
1722년 3월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격한 처단을 요구하고 있을 때 목호룡은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소위 삼급수설, 즉 대급수, 소급수, 평지수를 들어 고변했고 이 음모에 관련자들은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 었으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자질과 그들의 추종자들이었습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했다는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드러난 것으로 이는 목호룡이 남인 서얼로서 정치에 야심을 품고, 풍수술을 이용해 노론에 접근했으나 시세의 변화에 따라 고변함으로써 노론에 타격을 준 사건이 됩니다.
이 고변에 의해 국청이 설치되고 역모에 관련된 자들이 잡혀서 처단되는 대옥사가 일어났고 이 옥사에서 노론 4대신은 연루되어 사사됩니다.
국청에서 처단된 자 중에 정법으로 처리된 자가 20여 인이고 장형으로 죽은 자가 30여 인이며, 그 밖에 그들의 가족으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인, 유배된 자가 114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자가 연인원 173명에 달했습니다.
반면,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와 윤중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로 배향,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됩니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자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일경과 목호룡은 처단되며 임인옥안은 번안됩니다.
신인사화는 노론과 소론간에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결한 옥사이나 결과적으로 당인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영조의 탕평책도 그 자신이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집니다.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임사화는 1721년에 발생한 신축옥사, 1722년에 발생한 임인옥사를 합쳐 부르는 말로 조선 경종 때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이 집권하게 된 사건입니다.
숙종 후반에 들어 숙종이 노론 편을 들어주면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노론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숙종이 노론의 이이명과 독대하여 연잉군의 왕위 계승을 지시한 이래로 노론은 연잉군의 차기 왕위 계승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즉위한 경종은 지지기반이 미약했습니다. 노론은 병약한 경종이 후사를 볼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으라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대비의 승인까지 받아 이를 확정지었습니다.
내친김에 노론은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추진하였습니다. 경종도 처음에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소론측에서 반발하였고 대리의 명을 거두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경종은 대리청정을 취소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번복합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습니다. 이제 국왕에게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쪽이 역적이 될 판국입니다. 노론은 내키지 않지만 자리를 깔고 대리청정을 거두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왕의 마음이 바뀌지 않자 노론은 자리를 정리하여 철수합니다.
바로 그때 소론의 우의정 조태구가 눈물로써 경종에게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경종은 대리청정의 명을 취소하였습니다. 노론은 궁지에 몰렸고 순식간에 노론에서 소론으로 인사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게 신축옥사입니다.
그 다음 해에 목호룡이라는 사람이 고변하기를, 노론 가문의 자제들이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로 노론 측 인사들 60여 명이 처벌받았으면 노론의 대표격인 4명의 대신들이 사사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임인옥사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임사화는 조선의 경종 즉위 1년 후인 1721년부터 1722년까지 당파인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 왕세제 책봉 문제로 충돌했던 사건입니다 경종은 몸이 허약했고 아들이 없어 노론이 경종애게 왕세자 책봉을 주장함에 따라 연잉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노론의 4대신은 경종이 몸이 약했기에 대리청정을 주장하여 경종이 이를 허락하였고 이애 대항해 소론파가 부당성을 주장하여 대리청정이 취소되었으며 이 문제를 노론의 경종에 대한 불충으로 몰아 노론을 탄핵하여 노론의 4대신인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등이 차례로 사형을 당했던 사건입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임사화 (辛壬士禍)는 조선 경종 즉위 1년 후인 1721년 부터 다음 해 1722년 까지 당파인 노론 과 소론 이 연잉군 왕세제 책봉문제로 충돌한 사건 이라고 합니다. 신축옥사 경종은 몸이 허약하고 아들이 없었는데 이에 노론이 경종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함에 따라 1721년 (경종 1년) 왕제 (王弟) 연잉군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으며, 더 나아가 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 · 조태채 의 노론 4대신은 경종의 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주장하였고 경종이 이를 승인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임사화(辛壬士禍)는 신축년(1721)과 임인년(1722)에 일어난 붕당간의 대립입니다. 경종 2년 1721년부터 다음 해 1722년까지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나중에 영조) 왕세제 책봉문제로 충돌한 사건입니다. 이 사거능로 소론이 노론에게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게 됩니다. 당시 이 사건을 처벌 받은 노론이 200여명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임사화라는 용어는 당대부터 쓰였으나 화를 입은 노론측의 입장이 반영된 용어입니다. 노소론 사이의 대립에 왕통문제가 개입된 것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세자로 책봉되고 뒤에 왕위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의 처벌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습니다. 노론측은 장희빈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모해하였으므로 사사해야 된다고 주장한 반면 소론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한다고 대립하였습니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4년간 대리청정하다가 왕위에 오릅니다. 노론측은 연잉군(영조)를 왕세제로 삼고 대리청정을 계획합니다. 소론측은 노론측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 소론 정국을 구성하는데 성공합니다. 신임사화는 이러한 와중에서 목호룡의 고변사건 즉 노론이 숙종 말년에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고변을 계기로 일어나게 됩니다. 고변으로 8개월간 조사가 이뤄졌고 그 결과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가 화를 입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