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조선후기에는 성리학의 교조화가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성리학은 유교적 신분질서를 옹호하는데 역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실용성을 중시했던 성리학이 후기에는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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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건국의 정당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문물을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사림들은 성리학적 왕도정치를 강조하며 집권하였으며, 양반 중심의 질서를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사림들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붕당을 결성하여 갈등하였습니다. 그러나 명분론에 억매여 호란의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 나타난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윤휴와 같은 남인, 박세당과 같은 소론 세력들은 성리학의 상대화를 주장하거나 모순점을 비판하자, 송시열 등은 자신들의 자기모순을 회피하기 위해 이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우고 성리학을 절대화, 교조화하는 경향으로 강화되었습니다.
1명 평가안녕하세요. 권기헌 전문가입니다.
성리학적이라는 것은 행동이나 실천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이론이나 이상에 가까운 내용들을 우선시 하면서 이러한 이상향을 좇으면 자연스레 질서가 생기고, 나라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라는 생각입니다. 고려말 조선초에는 이러한 성리학을 기반으로 고려의 부정부패를 개선하고, 새로운 이념으로 삼아서 국가를 운영하려 하였으나, 조선 말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이 이제는 정신을 삼켜버리고, 무비판적이고 절대적인 교조화가 되었다는 것이죠. 결국 이상만 좇고, 당파 싸움으로 말로만 싸우니 조선후기부터 위기가 심화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