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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향고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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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논쟁은 어떤 논쟁인가요?

요즘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김활란 여사에 대해 잘못된 주장을 했다는 논란이 있는데요, 김활란 논쟁은 어떤 논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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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활란 논쟁의 초점은 김활란의 친일행위가 반민족적 행위였는가 아닌가보다는 김활란을 평가할때 ,

    여성 교육가 운동가로서의 그의 업적이 논쟁의 대상인듯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 무윤숙은 해방 후 단독정부 수립에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나는 나라를 위해 논개가 되겠다고 한 그녀는 미인계를 써서 목적을 달성하였습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던 인도의 외교관 메논과 교제하면서 그를 이승만 지지측으로 회유시켰기 때문입니다. 유엔 조선임시위원회 단장으로 있었던 시기에 모윤숙의 미인계로 많이 흔들렸음을 후에 기술하였습니다. 해방 이듬해 영어 잘하는 교양 있는 여성들로 구성된 낙랑클럽은 이화여대 총장인 김활란이 주도하여 150여명의 여성들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미군정청의 실력자들인 장성급 고급 장교 및 외교관 유엔 산하 각종 위원회 단체장 등을 상대로 고급 외교를 벌이는 비밀사교단체 조직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활란은 일제 강점기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에 소속되어 여성 운동을 전개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이화전문학 교사와 교감, 부교장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1931년 컴러비아 대학 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김활란은 1936년 이후 친일 행위에 적극 동참하였습니다. 1941년 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의 무장’, 1942년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서는 ‘대동아건설과 우리 준비’라는 주제로 강연으며, 여러 잡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뒷일은 우리가’,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등의 글을 발표하며 위안부로 종용하였다고 합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김활란 모윤숙 등이 영어 구사가 가능한 이화 여대 출신 여성으로 낙랑클럽을 만들어 외국인을 상대로 고급 외교를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 클럽은 이승만 대통령 등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고도 합니다. 이 사실은 미국무성 자료 등의 자료에서도 사실로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