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른뒤 어떠한 업적들을 이루었나요?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결국 왕위에 오르는 그인데. 이러한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뒤에는 어떠한 업적들을 이루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하고 재상의 권한을 축소,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유향소를 폐지하고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의 중앙집권체계를 강화했습니다.
호적, 호패제 강화, 진관체제 실시로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 중앙군을 5위 제도로 개편, 건주 야인 소탕으로 서북면 개척에 힘썼으며 하삼도 백성을 평안, 강원, 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 실시,
과전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과전 폐지, 직전법 실시, 집편전을 폐지, 문교면에도 진력해 제도 정비, 많은 서적을 편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58년에 호패법(號牌法)을 다시 시행하여 국민의 직임(職任)과 호구(戶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도둑의 근절에 주력하였습니다. 이 해에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수하였습니다. 즉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 4대의 치법(治法) · 정모(政謨)를 편집, 후왕의 법칙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 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게 했는데 이는 전대(前代)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의지에 따라 재조명한 것입니다.
세조는 정치가 안정됨에 따라 왕조정치의 기준이 될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였습니다. 최항(崔恒) 등에 명해 앞서 있었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정비, 왕조 일대(一代)의 전장(典章)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찬술을 시작하였습니다. 1460년에 호전(戶典)주4을 반행(頒行)하고 이듬해 1461년에는 형전(刑典)주5을 반행하였습니다. 세조는 무비(武備)주6에 더욱 유의, 1462년에 각 고을에 명해 병기(兵器)를 제조하게 하고, 1463년에는 제읍(諸邑) · 제영(諸營)의 둔전(屯田)을 성적(成籍)시켰습니다. 1464년에는 제도(諸道)에 군적사(軍籍使)를 파견해 장정(壯丁)주7의 군적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1466년에 관제를 고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司諫大夫)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편하게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종래의 시직(時職: 현직) · 산직(散職) 관원에게 일률적으로 나누어주던 과전(科田)을 현직의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職田制)로 바꾸어 시행하였습니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帥臣: 병마절도사)에 그 지방 출신을 등용하는 것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켰습니다.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습니다.
세조는 민정에 힘을 기울여 공물 대납(貢物代納)의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고, 잠서(蠶書)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국민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五倫錄)』을 찬수하게 하였습니다. 또 문화 사업으로서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 『주역구결(周易口訣)』 ·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 『대장경(大藏經)』의 인쇄와 태조 · 태종 · 세종 · 문종의 어제시문(御製詩文)을 편집, 발간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재위 초기의 불안정한 정국이 수습되자 『경제육전』 정비, 『경국대전』 찬술 시작 등 왕조정치의 기반인 법전편찬 사업을 추진했다. 관제개혁, 국방력 강화, 직전제 실시 같은 업적도 남겼고 편찬사업 등 문화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능호는 광릉으로 남양주시에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