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신진사대부와 무인세력은 어떻게 연대가 되어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말 신진사대부와 무인세력은 어떻게 연대가 되어 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과 의의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와 지방 무사들의 연대 형성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공통된 불만의 결과였습니다. 교육을 받고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새로운 귀족들은 부패와 소수 엘리트 집단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좌절했습니다. 한편,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한 지역 군 지도자들은 변화하는 정치 지형에서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새로운 귀족들과 지방 무사들은 동맹을 맺음으로써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울 수 있는 세력 기반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동맹은 새로운 왕조의 안정과 정당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이었고 앞으로 수세기 동안 발전과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신진사대부는 소위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고려의 불교를 대체할 새로운 왕조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주었으며, 신흥무인세력 역시 자기 자신들이 무력을 지니고 있었고, 이 무력으로 고려를 충분히 멸망시킬 수 있었으므로 군사적 기반 + 사상적 기반이 합쳐져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건국, 그 국가의 지배계급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말 기성지배층은 친원세력이 주축이었습니다. 이들을 권문세족이라고 하지요. 권문세족에는 고려 전기 지배층이었던 문벌귀족이나 무신집권기 성장했던 무신층도 있었지만 원지배기 원과 연결되어 성장한 친원세력이 많았습니다. 몽골어를 잘해 기회를 잡거나 공녀로 가서 황후까지 올랐던 기황후와 그 가죅인 기철이나 몽골인들이 매를 귀히여겼는데 매를 잘다루고 공물로 바쳐 컸던 가문 등이 대표적이죠.
이 친원세력을 숙청하고 개혁정책을 추진했던 이가 공민왕입니다. 반원정책을 본걱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고 이에 신진관리를 등용하는데 이때 성장한 새 세력이 신진사대부입니다. 공민왕은 친원세력에게 결국 시해되었지만 그 개혁의 씨앗이 신진사대부로 그리고 새왕조인 조선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이 신진사대부는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도입된 새 유학인 성리학을 수용한 이들이었습니다.
한편 고려말은 중국의 정세가 바뀌고 있었습니다. 몽골인 원이 재정문제와 황위계승다툼 등으로 쇠약하고 반원농민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몽골군은 작은 반란조차 쉬이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홍건적의 난도 이때 일어났는데 홍건적이 몽골군을 피해 고려로 와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또한 왜구도 조운선이나 해안에 출몰해 약탈했는데 내륙까지 출몰하는 등 그 피해가 커졌습니다. 이때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며 명성과 힘을 키워간 이들이 바로 신흥무인층이었습니다. 최영과 이성계가 대표적인 신흥무인이었습니다.
중국이 결국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고 명이 쌍성총관부 즉 공민왕이 수복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요동정벌을 단행하였습니다. 최영을 필두로 하고 이성계도 출동하였는데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통해 개경을 접수하고 실권을 잡았습니다.
이성계는 무인이라 신진사대부가 필요했고 신진사대부도 고려를 개혁하거나 새왕조를 개창하기엔 무력이 필요해 이 두 세력이 결합한 것이었습니다. 이 둘의 결합으로 양반이 지배층이 된 새 왕조가 개창된 것이었습니다. 고려의 귀족적 사회에서 양반관료제 사회로 출신보다 능력이 우선시되는 조금더 진일보한 근세사회로 발전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