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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
비비빙23.06.20

장희빈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장희빈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어떤인물이고어떤역사적 업적을 남겼는지 궁금합니다 장희빈에 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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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희빈이 생존한 시기는 숙종 초반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극대화되었던

    시기였으며, 장희빈은 그 속에서 남인과 서인 대립의 기폭제가 된 동시에 남인의 몰락을 가져왔던 인물입니다.


    남인이 기사환국으로 소생하여 정권을 잡게 된 것은 남인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장희빈에게는 큰 기회로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장희빈의 증조, 조부, 부친 모두 의정(議政)을 부여 받았으며, 장희빈의 부친인 장형에게는 1689년(숙종 15)에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의 칭호가 주어졌으며 급기야 1690년(숙종 16)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장씨는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이름은 옥정(玉貞)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부인 장응인(張應仁)과 외조부인 윤성립(尹誠立)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3품과 종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張炫)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首譯)을 지냈으며 거부(巨富)로 이름이 높았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內人)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1680년(숙종 6) 무렵부터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한 뒤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다.

    희빈 장씨는 1683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야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禧嬪)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가 정권을 남인(南人)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하면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씨가 폐비되고, 희빈 장씨가 1689년(숙종 15) 음력 10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 장씨는 그해 음력 4월 12일에 왕후(王后)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다. 그리고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就善堂)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희빈 장씨는 죽은 뒤에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매장되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옮겨졌다. 아들인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은 1722년(경종 2) 생모인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희빈장씨 [禧嬪張氏]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은 인동이며 이름은 옥정입니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로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조부인 장응인과 외조부인 윤성립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 3품과 종 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은 숙종 때 역관의 수장인 수역을 지냈고 거부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입니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 되는 바가 없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으로 뽑혀 입궁, 조선왕조실록에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있으며 1680년 무렵부터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고 당시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복창군 이정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습니다.

    희빈 장씨는 1638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 숙원으로 책봉, 소의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이 되었습니다. 당시 송시열 등의 서인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 정권을 남인에게 넘겨주어 결국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몰락하면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폐비되고, 희빈 장씨가 1689년 음력 10월 22일 왕비로 책봉되게 됩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 장씨는 그 해 음력 4월 12일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으며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되었습니다.

    희빈 장씨는 죽은 후 광주 진해촌에 매장되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경내의 대빈묘로 옯겨졌으며 아들인 경종은 1722년 생모인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희빈 장씨는 장희빈은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이며 20대 왕 경종의 생모 입니다.

    본관은 인동이며 이름은 옥정으로 전해집니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으로 뽑혀 입궁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르 따 올릴 때 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1680년 (숙종6) 무렵부터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 명으로 궁에서 쫓겨 났습니다.

    그리고 장희빈은 취선당 이라는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 되었습니다.

    희빈 장씩을 묘는 광주 진해 촌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매장 되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경내의 대빈묘로 옮겨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희빈(미상~1701)은 궁녀로 입궐하여, 왕자 윤(후의 경종)을 낳은 후 희빈에 봉작, 끊임없는 모사로 인현왕후를 폐서인시키고 국모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여인.


    이름 옥정. 아버지는 장형, 어머니는 장형의 계실 윤씨. 장안 최고의 거부이자 역관인 숙부 장현의 집에서 유복하게 성장했으나 가문의 몰락과 함께 궁녀로 입궐, 각고의 노력 끝에 숙종의 승은을 입는다.


    빼어난 미모와 영악함으로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1686년 내명부 종4품의 숙원으로 후궁이 된 것을 시작으로 2년 만에 정2품 소의로 승격되었으며, 이 때 제20대 임금이 될 경종(왕자 윤)을 낳게된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집안인 서인의 반대를 무시하고 1689년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정1품인 빈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로써 장옥정은 희빈 장씨가 되었고, 세자책봉은 불가하다고 상소한 송시열은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되어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己巳換局)


    이후 희빈은 숙종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이용하여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이때 백성들 사이에서는 소위 '미나리요'가 퍼졌다고 하는데, 인현왕후가 아기를 낳지 못해 장희빈에게 축출당한 사실을 풍자한 노래로,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가사로 되었다. 여기서 미나리는 민비를 가리키고 장다리는 장씨를 이르는 말로, 사철 푸른 미나리가 일시적인 장다리를 이겨 궁극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담은 참요(讖謠)이다.


    그러나 장희빈은 지나친 투기와 완악한 성정으로 숙종의 총애를 잃게되고, 1694년 서인의 김춘택 등이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숙종은 남인을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甲戌換局)


    중궁전에 앉은 지 5년만에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된 것. 그러다가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한 뒤, 희빈이 거처하고 있던 ‘취선당’에서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비가 죽기를 기원한 사실이 발각된다. 결국 숙종은 사약을 내리고 장희빈은 오빠 장희재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출처 : 시사상식사전


  • 안녕하세요. 이태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희빈은 역관 집안의 딸로 궁중 나인에서 숙종의 후궁에 까지 오르고 나주에는 왕자를 낳아 왕비의 지위에 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당시 정계는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져 서로 경쟁하였고 남인의 득세에서 장희빈의 등장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남인이 몰락하면서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사약을 먹고 죽음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