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주전론이 생긴 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척화주전론'이 생기게 된 배경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나요?
척화주전론이 생기게 된 시기는 언제이며
그 당시 시대상황은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양과 화의하지 않고 싸우자는 의미의 개화 반대 주장이다.
척화주전론은 화의(和議)를 반대하고 싸움을 주장한다는 의미로, 개화 반대 세력이 서양과의 수교를 비판하며 내세운 기치이다.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해안에는 서양의 이양선(異樣船)이 잇따라 출몰했고, 상륙과 통상 교섭을 요구해왔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 서구 열강이 조선에 피해를 입혔고, 1868년에는 독일인 오페르트(E. J. Oppert)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조선의 지배층에게 큰 불안감을 안겼고, 서양을 배격하자는 주장들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항로(李恒老)는 상소를 올려 양적(洋賊, 서양 세력)과 싸우자는 사람은 우리의 사람이고, 양적과 화친(和親)하자는 사람은 적국의 사람이라며 서양과 수교하지 않고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는 조선의 성리학적인 질서를 지켜 왕조의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 나름의 시대적 안목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항로를 필두로 한 척화주전론은 흥선대원군이 1871년 전국 각지에 세운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척화비에도 잘 드러나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척화주전론 [斥和主戰論]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척화주전론이란? 조선을 노리는 서양오랑캐들로 부터 정학인 주자성리학을 수호하고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구의 사상과 학문, 문화 등의 문물을 받아들이 말고 배격하자는 주장 입니다.
2.척화주전론비판(조선의 상황을 생각해서) 척화주전론의 일환으로 위정척사 운동을 하고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쇄국정책을 펼치면서 발달된 서구문물을 받아들지 않는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고 생각 합니다. 성리학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상과 학문, 이념 중에 하나 일뿐 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을 볼 때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당장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세력과 교류를 하기는 너무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난한 농업국가인 조선의 국력으로는 상공업이 발달한 서구열강과 대등한 위치에 있기에는 너무 힘들고 그 당시 조정은 무능했고 관리들의 비리와 비행, 부정부패가 심했고 백성들은 대부분이 무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너그러운벌222님.척화주전론은 조선 후기 신학자들의 주장으로, 이론의 핵심은 세속적인 교육과 공부를 통해 인간의 선성을 개발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이 주장은 이전의 유교 사상, 특히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척화주전론은 조선 후기인 19세기에 나타났는데, 이 기간은 사회와 문화, 그리고 유교 사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서구의 과학과 철학,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사상과 전통에 대한 도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척화주전론은 이러한 변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하였습니다. 과학과 실용주의, 그리고 인간의 선성을 중시하는 유교의 가르침을 토대로, 세상을 개선하고 변화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교육과 학문에 대한 접근법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교육의 중요성과 그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처럼 척화주전론은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조선 후기의 시대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시기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척화주전론은 화의를 반대하고 싸움을 주장한다는 의미로 개화 반대 세력이 서양과의 수교를 비판하면서 내세운 기치 입니다.
1860년대 들어서면서 조선의 해안에는 서양의 이양선이 잇따라 출몰하고 상륙과 통상 교섭을 요구하던 중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 서구 열강이 조선에 피해를 입혔고,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가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 이는 조선의 지배층에게 큰 불안감을 주었고, 서양을 배격하자는 주장들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