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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기와 나무 대문을 쓰는 집은 모두 대감집이었나요?

저희 할아버지/할머니 집이 좀 옛날 집입니다. 마당 안채는 그래도 개조를 했는데 마당 입구는 옛날 기와지붕에 나무 여닫이 문입니다. 그래서 친척어른은 여기가 대감 집이라고 하셨는데 대감 집이라고 하기에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안채 사랑채, 고방(창고), 머슴방 등이 들어설 만큼 마당이 넓지도 않으며 기와지붕 대문이 너무 좀 좁아요(앞예 돌계단이 있지도 않구요). 그래서 양반이라기 보다는 중인계급 집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갈 수도 있는데 당시 조선시대 생활상을 잘 모르니 반박하기가 어렵습니다. 혹시 조선 후기라도 일반 백성이나 중인이 기와지붕 나무 여닫이 대문을 쓰는 집이 있었나요? 아님 정말 양반 이상의 대감집만 가능하였나요?

1개의 답변이 있어요!
  •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양반은 인구의 1~2%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향촌에서도 사족으로 백성들을 지배하고 지주였으며, 노비도 많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거지도 기와집과 같이 규모가 컸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는 신분 상승으로 양반층이 70~80%이나 되었으나 평민도 공명첩, 납속 등으로 신분을 상승시켰습니다. 반면에 잔반 같은 경우는 농민들과 구별되지 않게 살았습니다. 따라서 양반이라도 모두 부유하게 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질문자의 가옥 같이 규모가 클 경우에는 애초에 양반이었거나 부농 등 경제력을 바탕으로 양반으로 신분이 상승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