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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거북이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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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실시 한 의창은 어떤 제도였나요?

금리 인상, 물가 상승 등으로 경기가 좋지 않아 서민들의 삶이 힘들어 졌는데요~

뉴스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사연도 들리는데,

이에 국가에서 소외되고 생활이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여러 복지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에 과거 우리 선조들은 어떠한 것들을 했는 지에 대해 확인했는데,

고려시대 의창이 있던데, 이 의창의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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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평시에 양곡을 비축했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기 하기 위한 제도가 바로 의창제도입니다.

    삼국시대부터 춘궁기에 곡식을 나눠주고 추수 때 거두어들이는 제도가 있었는데, 고려 때는 태조가 구호기관으로 흑창을 두었고, 986년 성종에 이르러 이를 의창으로 개칭하여 여러 지방에 확대하면서 설치하였다고합니다.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관에서 시가보다 비싼 값으로 곡물을 사들여 비축하였다가, 흉년에 곡가가 오르면 시가보다 싼값으로 방출함으로써 곡가를 조절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습니다.

    고려시대 의창제도의 특징을 보면 고구려의 진대법을 계승한 것입니다.

    고려 태조가 애민정책의 하나로써 실시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려 시대의 빈민 구제 제도. 빈민이 고리(高利)로 곡식을 빌려 사용하다가 갚지 못하면 노비로 전락하였다. 농민이 노비가 되는 현상이 많아지면 국가는 재정상, 국방상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는 봄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갚게 하는 빈민 구제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고구려의 진대법, 고려의 의창, 조선 시대(15세기)의 의창, 조선 중기(16세기)의 환곡, 조선 후기(19세기)의 사창 등이 그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창 [義倉]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 12. 10., 황병석)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의 의창은 말씀사힌대로 농민들을 위한 빈민 구제을 위한 창고같은 존재였습니다.

    풍년이었을때는 곡식을 보관해 두었다가 보릿고개가 심하고 흉년이 심하여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고통받을때 의창을 열어 곡식을 주었습니다. 이는 공짜는 아니고 빌려주는 개념이었던걸로 알려집니다. 보통 식량이 없는 시기에 빌려주었다가 가을 추수를 하고 나서 다시 회수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대신 이자는 받지 않았다고 해요.

    의창이란 개념은 중국에서 시작되서 삼국시대부터 어느정도 전해져왔다고 하네요.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의창 제도는 평상시에 곡식을 비축하였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제도입니다. 의창이란 것은 창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매년 3∼7월에 가구수에 따라 관의 곡식을 대여하고 10월에 회수하였던 제도입니다. 그래서 춘궁기에 백성의 불편을 감소시키기 위한 제도죠.


    이 의창은 고구려의 진대법에서 유래되었으며 조선시대까지 운영된 제도입니다.

  • 안녕하세요.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 의창은 왕실 및 관료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비대나 경찰청에 해당하는 제도였습니다.

    의창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주로 특정 지역의 경비나 법질서 유지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군사 의창은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였고, 서원 의창은 경비와 안전에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왕실 경비를 담당하는 철원 의창이나 경기도 수도인 강화도를 수호하기 위한 강화 의창 등이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창은 평시에 곡식을 저장하여 두었다가 흉년이 들면 그것을 빈민을 구제하던 기관 또는 곡식을 저장해두는 창고입니다.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후에 회수했고 자연재해가 빈번한 전근대 사회에서는 관청에서 농업의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해 종자와 식량을 보조해주거나 빌려주었는데 이자는 받지 않기도했습니다.

    기민에게는 죽을쑤어 먹이는 등 진제하고 궁민에게는 종자곡과 양식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진대가 원칙이었고 원래 의창은 중국 수나라에서 시작된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빈민구제 제도가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에 실시한 의창은 군사기구 중 하나로, 왕이나 왕세자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의 경호와 사회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의창은 경위병, 병자호위, 경찰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의창은 선비나 양반 출신이 아닌, 노비나 자유시민 출신의 군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지방마다 지휘관이 있었습니다.


    의창은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평민들의 안전과 질서 유지를 위해 경비와 경찰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의 군사와 경찰, 사법제도 등에 대한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의창은 왕권 강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이로 인해 권력의 남용과 부당한 탄압 등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이 나중에는 조선시대 의병 제도로 대체되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의창은 고려 및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구휼기관이다. 고려시대 개경의 의창은 986년(성종 5)에 국초부터 있던 흑창을 확대하여 설치한 것이고 지방 군현의

    의창은 현종 때 마련되었다.

    식량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진제와

    가을에 갚을 것을 전제로 하는 진대가

    있었다. 진대도 이식 없이 원곡만

    돌려주도록 했다. 고려 중기에

    국가재정난으로 유명무실해졌다가

    고려 말에 부활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태종 후반기에 운영되기 시작했고

    세종 때 크게 정비되었다. 중종 이후

    흉년 때에 의창이 아닌 군자곡을

    나눠주면서 의창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고려시대 의창은 국가가 빈민 및 소외 계층의 삶을 개선하고자 시행한 복지제도입니다. 의창은 불의를 겪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군인으로 육성하기 위해 이를 기본 체제로 삼았습니다.

    의창은 고려시대 중기부터 시행되었으며,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의창을 받았던 백성들은 농사일을 하는 자들, 도시에서 일하는 자들, 노비,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었습니다. 의창을 받는 대상은 일정한 기준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는 특정 계층을 지원했습니다.

    의창은 정부에서 지급하는 현금 지원제도였으며, 지급액은 지급 대상과 상황에 따라 상이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 상황에서는 군인들에게 의창이 지급되어 군인들의 가족들을 지원했고, 기근이나 자연 재해가 발생했을 때는 해당 지역의 농민들에게 의창이 지급되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의창을 지급받는 대상에 대해 관리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지급 대상자는 가난한 삶을 유지하며 의창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한 소비를 하거나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경우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의창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국가 복지 제도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