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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12.21

살수대첩의 승리비결은 무엇인지요?

안녕하세요 을지문덕장군께서 수나라의 침략을 살수대첩으로 무찔렀는데요 살수대첩의 승리비결은 무엇이었는지 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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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수나라의 양제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며, 요동성을 포위한 채 대치하였습니다. 이에 을지문덕 장군은 적의 식량 사정이 어려움을 꿰뚫어보고 적장 우중문에게 시를 보내 회유하였습니다. 지친 수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청천강)의 상류를 막아두고 기다렸다가 적이 살수를 반쯤 건을 때 막아둔 둑을 터뜨려 공격하였습니다. 이로써 수나라 군대는 대패하였고 살아돌아간 병력은 약 2700명에 불과했다고 전해집니다. 살수대첩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전투로, 을지문덕 장군의 뛰어난 지략과 용기가 돋보인 사건입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살수대첩의 승리 비결은 을지문덕 장군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 그리고 고구려군의 강력한 군사력과 용맹함에 있습니다. 을지문덕 장군은 적들의 식량과 무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적들을 유인하여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고구려군은 강력한 군사력과 용맹함으로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살수대첩은 612년(영야왕 23) 7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의 하나입니다. 612년 7월 24일에 을지문덕이 지휘한 고구려군이 우중문 우문술 등이 지휘한 수나라군을 살수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였습니다.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입니다.(살수에 대한 최근 논문에 요동위에 있다는 설이 제기됨)고구려군의 승리비결은 상대방을 치켜 세우면서 계속 후퇴를 하여 진을 빼고 적의 보급로를 지연시키는 등의 작전과 살수에서 수공을 펼친 것이 비책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살수대첩 승리의 비결은 여러가지를 들 수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식량을 고구려 접경에서 구할 수 없기때문에 먼 중국 본토에서 실어서 와야 한다는 것이 치명적이었구요, 두 번째는 철저한 공성전을 통해서 수나라의 육군을 무력화하고 지치게 만들었다는 점이 결국 살수대첩과 같은 승리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살수대첩과 같은 경우에는

    보금문제와 더불어서 을지문덕의

    뛰어난 전술 등으로 승리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12년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13만여 명에 달하는 수(隋)나라군은 음력 3월 15일, 요하에 도달했다. 수나라 침공군의 전 병력이 탁군을 떠나는 데만 40일이 걸릴 정도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대규모의 군대였음을 생각하면 대단히 진군 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수나라군은 요하를 건너는 데만 2개월이 걸렸다. 천신만고 끝에 요하를 건너 요동성 공성전을 시작했지만, 수나라군은 또 다시 1개월이 넘도록 요동성 함락은 커녕 큰 손실을 입고, 음력 6월을 맞이했다.

    게다가 병력과 물자의 손실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시간이었다. 수양제는 지나치게 거대한 병력을 이끌고 와서 (설령 요동성을 바로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해도) 겨우내 보급을 받으며 요동에 계속 주둔하기는 힘들었기에, 곧 겨울이 다가오면 힘들여 함락한 성들을 모두 뱉어내고 도로 본토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요동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3개월이라는 금쪽같은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 당시로서는 더더욱 답이 없었다.

    이에 수양제는 지지부진한 전황을 타개할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졌다. 전군에서 정예병을 추려 300,000명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우중문과 우문술의 지휘하에 평양성으로 직행시키는 한편, 황해를 건너는 내호아의 수(水)군과 합류하여 한 방에 평양성을 함락시키려는 대담무쌍한 작전이었다.

    전개


    양제의 계획은 성공한다면 위협적이었겠지만, 문제는 보급이었다. 당시 수나라군은 300,000명에 달하는 별동대에게 100일 분의 식량과 피복, 병장기, 야전텐트 등을 분배하여 운반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렇게 군장을 분배한 결과 병사 1인당 군장의 무게가 무려 석 섬(약 50kg)이나 된 것이었다.[10] 그러다 보니 이 무식한 짐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한 수나라 병사들이 보급품을 길가에 버렸다.[11] 특히 수나라 장수들은 군수품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어버린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각자 작정하고 몰래 구덩이를 파 묻는 행위를 일일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별동대는 행군 중에 심각한 물자 부족을 겪게 되었다.

    한편 수나라군이 압록강 근처에 다다랐을 때 고구려에서는 을지문덕이 항복을 구실로 홀로 적군의 본진에 다다랐다. 그리고 별동대가 피로와 굶주림에 지쳐 있어 작전을 실행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직접 확인했다. 일찍이 수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을지문덕을 만나거든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몰래 명령했으나, 참군(參軍) 유사룡이 사신을 함부로 해치면 안 된다며 을지문덕을 그냥 보내주자고 주장했고 이에 우중문도 할 수 없이 보내주었다. 물론 수나라 장수들이 마음을 바꾸어 을지문덕을 다시 불러오려고 했으나 을지문덕은 그대로 유유히 압록강을 건너가 버린 뒤였다.

    우문술은 군량 부족을 이유로 퇴각을 건의했지만 우중문은 아니었다. 수양제가 이미 우중문을 대장으로 삼아 지휘계통을 정리했기 때문에 그의 의견대로 수나라군은 평양을 향해 진격했고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의 피로를 가중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교전을 강요하면서도 수나라 군대가 발을 빼지 못하도록 짐짓 패배하는 척 더욱 깊숙이 끌어들였다. 어느 날은 우문술의 군대를 상대로 하루에 7전 7패, 즉 7번 싸우고 7번 도망가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고구려군은 게릴라전만 열심히 해대며, 수나라 군대의 체력을 빼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고구려군의 계획대로였다. 결국 을지문덕은 지속적인 유인 끝에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 앞 30리까지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평양성은 견고하여 수나라군은 지친 상태에서 함락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바다를 통해 상륙하여 호응하기로 했던 내호아는 왕제인 고건무에게 철저하게 박살이 난 상태라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神策究天文신 책 구 천 문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깨달았고
    妙算窮地理묘 산 궁 지 리 신묘한 셈은 땅의 형편(지리)을 다하였도다
    戰勝功旣高전 승 공 기 고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지 족 원 운 지 원컨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입조(入朝), 즉 항복을 약속하는 듯한 거짓 항복 문서를 보냈다. 이때 을지문덕은 한 편의 시를 같이 보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이다. 언뜻 보면 띄워주는 내용 같지만, 당시 수나라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철저한 조롱이었다.

    우중문은 답신을 보냈으며, 을지문덕은 이에 대해 다시 답신을 보내기를

    '수나라가 군대를 물리면, 자신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

    는 확인 서한을 보냈다. 물론 그만한 지위에 올라간 우중문이 정말로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이게 거짓말이라는 건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퇴각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체면치레, 즉 수양제에게 변명할 거리 하나를 간신히 챙겼다고 생각한 우중문은 그제야 퇴각을 결심했다. 물론 이것 역시 수나라군을 조금이라도 더 철저하게 파멸시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준비 시간을 벌려는 을지문덕의 치밀한 계획일 뿐이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이 퇴각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알고는 병력을 준비해 놓았다. 즉 이 시점에서 수나라군 별동대 300,000명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수나라군의 별동대는 힘겨운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평양성 코앞까지 유인하기 위해 거짓 후퇴만 거듭했던 그 때까지와는 반대로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갔다. 사방에서 공격하여 수나라 군대를 쳐부수기를 반복했으며, 수나라군은 방진을 치며 맞섰다.


    고구려군의 계속되는 공격속에 약화될 대로 약화된 수나라군 별동대는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간신히 도착했다. 수나라군이 도하를 시작하여 총병력의 절반쯤이 강을 건너는 순간,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 병력을 집중시켜 최후의 총공격을 개시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전에 이르기까지 지상군이 제일 취약한 순간 중 하나가 도하 중일 때였으니 을지문덕의 전투 개시 시점이 절묘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수나라 후군이었다. 수나라의 후위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고, 지휘관인 우둔위 장군 신세웅마저 전사할 정도로 철저하게 박살났다. 그리고 후군의 이런 참담한 붕괴로 인해 300,000명의 대군 전체에 극도의 공포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패닉에 빠진 수나라군 장병들은 살기 위해 서로 도주하면서 연쇄적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군대는 최소한의 편제와 통제가 무너지면, 30만 대군이 아니라 300만 대군이라 할지라도 먹잇감에 불과하다.

    수나라군 전체가 와해되는 대혼란 가운데서도 몇몇 수나라군 부대는 감투 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별동대의 지휘관들 중 설세웅은 백석산에서 빗발치는 화살비와 포위망을 돌파하며 고구려군 일부를 격퇴하는 무용을 떨치기도 했고, 또 다른 지휘관 왕인공도 고구려군 일부를 물리치는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전으로는 전황을 뒤집기에 턱없이 부족하여 거의 의미가 없었다. 305,000명 중 살수(청천강)에서 빠져나와 압록강에 도착한 장병은 겨우 2,700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그 2,700명도 하루 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450리(177 km)를 도망쳐 왔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기병의 진격속도가 하루 100km가 최대였음을 고려하면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수나라군 패잔병이 대형을 유지하기는 커녕 장비도 다 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도망쳤다는 것을 과장법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유사룡은 패전 후 처형당했고, 우중문은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에 홧병으로 병보석을 받고 자택에서 죽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수나라 입장에서는 돈과 인력을 말 그대로 다 때려부었음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전쟁이었다.

    결과

    수나라군 별동대 300,000명은 2,700여 명만 남고 모조리 증발했다. 이에 남은 수나라군 총병력은 즉시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대전으로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은 종결되었다.

    잔존 병력들이 간신히 본진에 도착하자 수양제 양광은 큰 충격을 받았고 대노하여 패장인 우중문과 우문술을 쇠사슬로 포박하여 서도인 장안까지 끌고 갔다. 이후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서인(庶人)으로 전락시키고 감옥에 가두었다. 다만 우문술은 제3차 고구려-수 전쟁 때 복권되어 참전했다. 특히 유사룡은 을지문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패전의 원흉으로 규정되어 참수되었고, 머리가 효수되었다. 사실 패전에 가장 큰 책임이 있었던 내호아는 정작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우중문과 우문술도 죽음은 면했으니 괜히 애꿎은 유사룡만 패전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한편 별동대의 지휘관들 중 한 명이었던 설세웅은,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종횡무진 활약한 공으로 포상을 받아 승진하기도 했다.

    수양제는 이후 제3차, 제4차 침공을 계속 이어나갔으나 끝내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렇게 무리한 원정 탓에 그 끝을 모르던 수나라의 국력은 어느새 고갈되었고,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며 대규모 반란이 거듭 일어나 수양제는 강남의 강도에서 근위병들에 의해 교살당하고, 수나라는 멸망했으며 양씨 황족들은 돌궐(쾩튀르크)로 도망친 어린 황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멸당했다. 이로 인해 살수 대전 한 번으로 대제국을 말아먹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