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수민 전문가입니다.
내용부터 보면 제0법칙은 아주 당연해 보이는 말이에요. A와 B가 열평형이고 B와 C가 열평형이면 A와 C도 열평형이라는 거예요. 너무 뻔해서 굳이 법칙이라 부를 필요가 있나 싶은데, 이게 없으면 온도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요.
온도계를 생각해보면 이유가 보여요. 온도계 B를 물체 A에 댔다가 물체 C에 댔을 때 같은 눈금이 나오면 우리는 A와 C의 온도가 같다고 말해요. 그런데 이 결론은 A와 C를 직접 접촉시킨 적이 없는데도 내린 거잖아요. B를 매개로 A와 C를 비교할 수 있다는 보장이 바로 제0법칙이에요. 이 법칙이 성립하니까 모든 물체에 온도라는 하나의 숫자를 붙일 수 있고, 온도가 같으면 열이 안 흐르고 다르면 흐른다는 판단이 가능한 거예요. 온도는 측정하기 전에 먼저 그런 양이 존재한다는 논리적 근거가 필요했던 셈이에요.
번호가 0인 건 역사의 순서 때문이에요. 1법칙과 2법칙은 19세기에 정립돼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고, 온도의 정의 문제는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져 아무도 명시하지 않았어요. 1930년대에 물리학자 파울러가 열역학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다가 이 전제가 다른 법칙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걸 지적했는데, 이미 자리 잡은 번호를 다 밀어낼 수는 없으니 그 앞에 0을 붙인 거예요. 논리적으로는 첫째지만 발견은 나중이었던 법칙이라 번호가 그렇게 된 거죠.
기초일수록 당연해서 늦게 눈에 띈다는 게 과학사에서 종종 보이는 패턴인데, 제0법칙이 그 대표 사례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