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누르하치가 1616년 여진족을 통일하고 수립한 후금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명을 배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금은 명과 대립 중에서 있었기 때문에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 외교를 통해 실리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명나라는 후금과 대립하면서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천 명나라의 원병을 보냈으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하였습니다. 도원수 강홍립(姜紅立)은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후금과 휴전을 맺었고, 그 후 명나라는 모문룡(毛文龍) 부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假島)에 주둔케 하였으나, 조선 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습니다. 다시 말해 명나라와 후금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내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실리정책을 펴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