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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도화지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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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은 원래는 해인사에 보관했던게 아니라, 조선 초기에 해인사로 옮겨졌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해인사에 있는 팔만 대장경은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근데 원래는 해인사에 보관했던게 아니라, 조선 초기에 해인사로 옮겨졌다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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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경주의 화엄사에서 보호되지 못하고 일본으로 약탈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이 조선 초기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은 일종의 보호 및 보존을 위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화도에서 만들어져 보관중이던 팔만대장경이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찌보면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고려시대에 최초로 만들어진 구판대장경이 있었는데 몽공군의 방화로 소실되었습니다.

    그래서 몽골과 가까운 강화도와 서울은 안전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과 멀리 떨어져 몽공의 침략이나 왜구의 노략질을 피하기 위해서

    먼 남쪽땅인 합천 가야산의 해인사로 대장경판을 옮겨던 것입니다

    그럼 도움이 되셨길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는 거란의 침략을 막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력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을 축조하였습니다. 11세기 거란군은 고려를 침략하여 강산을 초토화시키고 인명을 살상하였습니다. 이에 고려 현종부터 선종때까지 약80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만들었고 흥왕사에 보관했다가 후에 부인사와 대구 팔공산으로 옮겼으나 1232년 몽고침입때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이후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23년-38년 16년에 걸쳐 간행되었습니다. 한번 만들었던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서 재조대장경이라고 합니다. 판수가 팔만개라고 해서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팔만사천 번뇌에 해당하는 팔만사천 법문을 실었다고도 합니다. 이런 조판사업은 국가사업이었기 때문에 최우가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만들었고 판각은 경상남도 남해군지역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하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해인사는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든

    들어오는 길이 없을 만큼 차단된 곳이라 조정에서도 가야산을 신령스러운

    명산으로 여겨 팔만대장경을 온전히

    보전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은 일본의 나라 경(나가라 국, 지금의 나라 시가)에서 제작된 대장경으로, 조선시대 초기에 해인사로 옮겨진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1. 왕실의 관심과 후원: 조선 초기에는 왕실이 불교를 지원하고 육성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불교 사원들에게 경전 등의 학문적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팔만대장경도 이와 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해인사로 이송되었습니다.

    2. 해인사의 중요성: 해인사는 고려시대에 설립된 중요한 불교 사원으로, 경주에 위치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 불교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중심에 위치한 해인사에 중요한 경전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면서 사원의 역할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3. 불교 문화의 유지: 조선 초기에는 기독교의 도입으로 인해 불교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을 옮겨 두어 불교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4. 경전의 보호와 연구: 경전은 불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학문적 지식을 제공하였고, 이를 보호하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시되었습니다. 해인사는 경전을 잘 보관하고 연구하는 환경을 제공하여 불교 경전의 유지와 보호에 기여하였습니다.

    이처럼 조선 초기에 해인사로 팔만대장경이 이송된 이유는 왕실의 불교 육성 정책과 해인사의 중요성, 그리고 불교 문화의 보존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하여 이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