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의 희망봉은 왜 희망봉이라고 불리게 되었나요?
남아공에는 희망봉이라는게 있잖아요, 그런데 남아공의 희망봉은 왜 희망봉이라고 불리게 되었나요? 그냥 큰 의미없이 붙여진 이름인가요? 아니면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희망봉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위치한 곶으로 대서양과 인도양의 경계 중 하나이자 수에즈 운하 개통 이전 클리퍼 항로에서 케이프타운 중간 기항지의 지리적 표징으로 애용되었던 지형입니다.
희방봉은 항해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고 아프리카의 지리 역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시절 '드디어 최남단에 도착했다'고 착각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포르투칼 탐험가 바르톨르뮤디아스에 의해 발견된 신대륙 아프리카가 발견되고 이후 바스코다가마에 의해 또 다른 대양인 인도양을 알게되면서 대서양과 인도양을 이어준다는 의미로 희망봉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희망봉
포르투갈 군대가 바하도르 곶을 지난 시기를 전후로 엔리케는 교황 마르티누스 5세(재위1417-1431년)에게 청하여 ‘앞으로 인도까지의 구간과 인도에서 발견된 모든 토지를 포르투갈령으로 한다’는 내락을 받았다. 1493년에는 교황 알렉산드르 6세(재위 1492-1503년)가 아조레스 제도의 서쪽(서경 약 30°)을 경계선으로 그것보다 동쪽의 반구(동경약 150°까지)를 포르투갈, 서쪽의 반구를 에스파냐의 세력 범위로 하는 교황 경계선을 제안하였다. 다음 해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는 교황 경계선을 약 1600km 서쪽으로 움직인 것으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양국이 합의하였다.
포르투갈 인들은 1471년 적도를 넘어 현재의 가나 즉 황금 해안을 황금 거래와 탐험의 기지로 삼았다. 이후 서해안을 남하하여 1484년에는 자이르(콩고) 하구를 발견하여 상륙하였다. 1487년에 3개의 석주를 배에 싣고 포르투갈을 출발한 디아스(Bartholomeu Diaz : 1450-1500년)는 나미브 사막 남단에 있는 오렌지 강 하구에 도달하여 그 곳에 최초의 석주를 세웠다. 그 후 남하한 곳에서 격렬한 폭풍우에 휘말려 약 2주일 동안 육지를 볼 수 없었다. 폭풍우가 가라앉았을 무렵에 이제까지의 포르투갈 배의 상식에 따라 동진하였지만 육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북진을 감행했을 때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도착한 것 같음을 알게 된 그들은 해안선을 따라 동진하여, 마침내 해안선이 북쪽을 향해 구부러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디아스는 아프리카의 동쪽 해안을 따라 그대로 북상하자고 제안하였지만 겁이 난 선원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제2의 석주를 세우고 되돌아 가기로 하였다. 도중에 큰 곶을 만났는데, 폭풍 때문에 가는 길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데서 연유하여 ‘폭풍의 곶’이라 이름 붙이고 그 곳에 제3의 석주를 세웠다. 1488년의 일이다.
귀환한 그들로부터 사정을 전해들은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그 후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 곶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데 연유하여,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하다고 여기고는 Cabo da Boa Esperana(희망의 곶)라고 개칭, 그것을 ‘희망봉’이라고 이름 지었다. 인도 항로를 찾는 희망을 북돋운 곶이었기 때문이다. Cape Town 근처 해발 256M(840ft),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아굴라스곶의 북서쪽 160km 지점. 대서양과 인도양 사이를 항해할 때 기점으로 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