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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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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관료이자 학자였던 신숙주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들러보던 도중 학자 한명이 잠들어있길래 자신의 옷을 덮어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숙주라고 하는데요.


신숙주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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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전향이 충격적이었는지 오늘날에도 변절자의 대명사처럼 회자됩니다. 세조에게 협력하고 집현전 동료인 성삼문의 처형을 주장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정인지나 나머지 집현전 선배 최항, 정창손처럼 세조의 정변을 도운 집현전 선배들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 신숙주보다는 더욱 명확한 배신자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세간의 평가는 신숙주에게 좀더 가혹하다. 그만큼 신숙주의 능력과 성품에 걸었던 기대와 믿음이 컸다는 반증일지도. 정인지, 최항, 정창손은 다 선배들로 세종 말엽에 이미 고위직 관료들이었고, 대체로 그보다 낮은 관료들이었던 신숙주의 동기급들인 사육신들은 단종을 복위하다가 사망했으나, 신숙주만 수양대군편에 붙었으니 비판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숙주의 아버지는 신장, 어머니는 나주 정씨로 정유의 딸이고 신숙주의 할아버지는 신포시, 할머니는 경주 김씨로 김충한의 딸이며 신숙주의 증조부는 신덕린, 증조모는 정신호의 딸이며 신숙주의 고조부는 신사경입니다.

    책을 읽으려고 집현전 숙직을 도맡아서 했다는 일화가 있을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으며, 소문난 수재이자 책벌레였습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하루는 어느 집현전 학자가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들었길래 세종이 자신의 옷을 덮어 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이 신숙주입니다.

    세종 시절에는 일부러 책을 읽기 위해 남들이 기피하는 궁궐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하며 이 때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그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는데 세종이 이걸 보고 본인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가 필원잡기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성삼문은 신숙주만 따로 언급하면서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언급합니다.(세조실록 2년 6월 2일) 변절자로 낙인 찍힌 신숙주를 윤영손이 처단하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제지하고 거사를 연기하기로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입니다.


    신숙주는 젊은날에는 집현전 학사도 하는등 세종의 총애도 받았고, 나중에 단종때는 궁궐내 수양대군의 압력으로

    사육신의 반대편이 되어서 계유정난에서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습니다 , 후에 세인들로 인하여, 정당하지 않은 처신으로 변절자라는 오명도 덮어썼으나 , 세조 치하에서 조선의 대외외교 , 학문관계등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38년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전농시직장이 되고 1441년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했습니다. 1442년 국가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할때 참가해 공적이 많으며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해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13차례 내왕했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신숙주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1447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응교가 되고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검 등이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이해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을 역임합니다.

    1452년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수양대군과의 유대가 이때부터 특별하게 맺어지며 145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오른 뒤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쳤습니다.

    같은 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고 수충협책정난공신 2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습니다.

    1455년 수양대군 즉위 후 동덕좌익공신의 호를 받고 예문관대제학에 초배되어 고령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주문사로 명나라에 가서 새 왕의 고명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온 공으로 토전, 노비, 안마, 의복을 함께 받았습니다.

    1456년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을 전장하였으며 판중추원사가 되어 판병조사를 겸하고 우찬성이 되어서는 대사성을 맡았습니다.

    1457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이 무렵 동북 방면에 야인의 잦은 침입으로 강경론을 폈고 1460년 강원, 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해 출정했으며 군사를 몇개 부대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펴 야인의 소굴을 크게 소탕하고 개선했습니다.

    1462년 영의정부사가 되고 1464년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해 사직한 적이 있으며 1467년 다시 예조를 겸판했습니다.

    이듬해 예종이 즉위함에 유명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원상으로 서무를 참결, 같은 해 이른바 남이 옥사를 처리해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이듬해 겨울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해 대통의 승계에 공이 컸습니다.

    성종이 즉위함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 노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1472년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이어 세조때부터 작업 한 동국통감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해 신숙주의 집에서 총관,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 받은 국조오례의 개찬, 산정을 위임받아 완성했으며 여러 나라의 음운에 밝아, 여러 역서를 편찬, 일본, 여진의 산천 요해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해동제국기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략,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 사선내왕의 절차, 우리측 관궤의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해 일본과의 교빙에 도움이 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기고 1475년 일생을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