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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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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오계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난건가요?

안녕하세요.

세속오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나요?

누가 만들었으며 세속오계로 인해서 사회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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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원

      ‘화랑오계(花郎五戒)’라고도 한다.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사량부(沙梁部)에 사는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가르친 것에서 비롯되었다.

      600년(진평왕 22) 원광이 중국 수나라에서 돌아와 운문산(雲門山) 가실사(嘉瑟寺)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평생의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청하자, 사군이충(事君以忠)주1 · 사친이효(事親以孝)주2 · 교우이신(交友以信)주3 · 임전무퇴(臨戰無退)주4 · 살생유택(殺生有擇)주5 등 다섯 가지 계율을 가르쳤다.

      그 뒤 두 사람은 이를 잘 지켜서 602년 백제와의 아막성(阿莫城) 전투에서 화랑의 일원으로 싸우다 순국하였다.

      *사상적 배경

      이 계율은 특히 화랑들에 의하여 잘 지켜졌고 화랑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오계가 화랑들만의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원광이 가르쳤다고 해서 그의 독창적인 견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는 그 당시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대정신이 당대의 석학인 원광의 탁월한 식견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정리 ·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신라인들의 이러한 이념의 연원을 밝혀주는 것으로는 『삼국사기』 권4 진흥왕조에 실린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郎碑序)가 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었으니 풍류(風流)라 이른다. 그 교(敎)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화랑도는 원광이 세속오계를 가르치기 24년 전인 576년(진지왕 1)에 마련되었는데 이에 앞서 이미 ‘풍류’라는 도가 있었고, 당시까지 비록 유교 · 불교 · 도교 등 세 가지 사상이 전래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신라사회에는 이들 사상을 포함하였다고 할 만한 고유사상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기록상으로도 유교의 경우는 682년(신문왕 2)에야 국학(國學)이 정식으로 설립되었고, 불교는 527년(법흥왕 14)에 공인되어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며, 도교 또한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세속오계의 사상적 연원이 된 신라의 고유사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그 당시까지 신라사회를 지배하며 발전해 온 사상적 특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라는 지증왕대에 이르러 비로소 정식으로 국호를 제정하고 왕권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때까지 신라는 신의 뜻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제정일치(祭政一致)체제의 철저한 신권국가였다.

      개국설화에서 나타나듯 신라는 시조왕 박혁거세 탄생의 신이성(神異性)을 믿고 그를 임금으로 봉대(奉戴)함으로써 신의를 따르려 하였으며, 이러한 사상은 그 뒤 왕위승계에 있어 세습제를 따르지 않고 박 · 석 · 김 3성 중에서 인물 본위로 왕위를 승계하도록 한 사실에서도 분명히 이어진다.

      당시 신라인들이 뚜렷하게 간직하였던 이러한 사상을 후세에서는 ‘고신도사상(古神道思想)’이라고 부르거니와, 이 사상은 멀리 고조선 초기의 단군신화에서 비롯되었으며 당시 동북아시아 일대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무속신앙의 형태를 갖추면서 이어져 왔다.

      신라의 경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南解次次雄條)에 임금 자신이 무속신앙의 중심인물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더욱 분명하다.

      이렇듯 무속신앙의 형태를 갖추며 이어진 고신도사상의 특징과 사회적 기능은 어떠한 것인가? 이러한 사상적 바탕과 신앙적 형태는 상보작용(相補作用)을 하면서 그 특징과 사회적 기능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낸다.

      그 특징으로는 하늘의 뜻[神意]을 받드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개개인의 무구청순(無垢淸純)한 신앙적 심성과, 어떠한 일보다도 소중한 것으로 간주되던 하늘과 조령(祖靈)을 모시는 제의(祭儀)에 대한 지극한 정성(精誠), 그리고 이러한 청순한 심성과 지극한 정성을 통해 이룩된 천신(天神)과 무(巫)와 사람[人]의 종적 관계가 동족공동체라는 횡적 관계로 파급되어 조성된 공고한 공동체 의식 등을 들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속오계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이 화랑에게 일러 준 다섯가지 계율로 승려 원광이 수나라에서 부처의 진리를 구하고 귀국 후 화랑 귀산과 추항이 찾아가 일생을 두고 경계할 것을 청하자, 원광이 이 오계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뒤에 화랑도의 신조가 되어 화랑도가 크게 발전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게 하는데 기여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속오계는 신라시대 화랑이 지켜야 했던 다섯 가지 계율입니다. 원광법사가 사량부의 화랑 기산과 추항이 가르침을 청하자 내려준 계율입니다.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 그 내용입니다. 유교·불교·도교 등 세 가지 사상이 전래되기 전부터 신라에 존재하던 풍류·화랑도 등의 고유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공동체의식과 철저한 의리 정신, 숭고한 희생 정신, 그리고 선량한 인간의 정신을 담은 세속오계가 나온 것입니다. 그 당시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대정신이 당대의 석학인 원광의 탁월한 식견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정리·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광법사라는 스님이 가르쳤고, 충효를 말하고 있어서 유교와 불교의 깊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기 신라 사회에서 유교와 불교는 아직 그 뿌리는 깊이 내렸다고 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왕'이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이 진평왕의 즉위 불과 30년전인 지증왕 때이며, 그전까지 사용했던 각종 호칭(특히 차차웅)이 신권정치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신라에서는 아직도 샤머니즘적인 무속신앙이 지배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신라 특유의 신앙을 고신도사상(古神道思想) 혹은 풍류(風流) 라고 불렀는데, 세속오계는 이러한 당시 신라인 특유의 사상이 압축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출처: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