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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사건은 무슨 사건이었나요??

안녕하세요.

모로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사건이었나요?

모로코 사건이 일어나게 된 시기와 그 원인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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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모로코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지점에 있어, 19세기 후기의 세계분할 시대에 유럽 열강의 분할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1880년 열강에 의해 체결된 마드리드조약에 의하여 모로코의 독립은 인정되었으나, 20세기 들어 프랑스 세력의 모로코 침투가 두드러졌습니다.

    제1차 모로코사건은 탕헤르사건이라고도 합니다. 프랑스가 특히 모로코의 내정개혁을 요구한 데 대하여, 1905년 3월 31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모로코의 탕헤르항(港)을 방문하여 모로코의 영토 보전과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연설을 하였다고 합니다. 프랑스에 반감을 가진 술탄을 원조하고 프랑스의 이권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와 독일은 극도의 대립상태가 되었습니다. 1906년 1~4월에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알헤시라스 국제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의 결속이 강하였기 때문에 독일은 고립상태가 되고,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진출이 합법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제2차 모로코 사건은 1911년 모로코의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을 위해 프랑스가 출병하였다. 그해 7월 독일은 군함을 파견하여 프랑스군을 위협하였다. 이 사건을 아가디르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영국이 프랑스를 강력히 지지하였기 때문에 독일은 프랑스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양국 간에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독일에 콩고의 북부지방을 할양해주는 대신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승인하였다. 1912년 프랑스는 모로코를 보호국으로 하여 식민지 지배를 완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로코사건 [Moroccan crise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모로코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지점에 있어, 19세기 후기의 세계분할 시대에 유럽 열강의 분할대상이 되었다. 1880년 열강에 의해 체결된 마드리드조약에 의하여 모로코의 독립은 인정되었으나, 20세기 들어 프랑스 세력의 모로코 침투가 두드러졌다.

    제1차 모로코사건은 탕헤르사건이라고도 한다. 프랑스가 특히 모로코의 내정개혁을 요구한 데 대하여, 1905년 3월 31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모로코의 탕헤르항(港)을 방문하여 모로코의 영토 보전과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프랑스에 반감을 가진 술탄을 원조하고 프랑스의 이권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와 독일은 극도의 대립상태가 되었다. 1906년 1~4월에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알헤시라스 국제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의 결속이 강하였기 때문에 독일은 고립상태가 되고,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진출이 합법적으로 인정되었다.

    제2차 모로코 사건은 1911년 모로코의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을 위해 프랑스가 출병하였다. 그해 7월 독일은 군함을 파견하여 프랑스군을 위협하였다. 이 사건을 아가디르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영국이 프랑스를 강력히 지지하였기 때문에 독일은 프랑스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양국 간에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독일에 콩고의 북부지방을 할양해주는 대신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승인하였다. 1912년 프랑스는 모로코를 보호국으로 하여 식민지 지배를 완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로코사건 [Moroccan crises]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5년~1906년 , 1911년 두 차례 모로코의 분할을 둘러싸고 일어난 국제 분쟁입니다.

    모로코는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지점에 있어 19세기 후반의 세계분할 시대에 유럽 열강의 분할대상이 되었으며 1880년 열강에 의해 체결된 마드리드조약에 의해 모로코의 독립은 인정되었으나 20세기 들어 프랑스 세력의 모로코 침투가 두드러졌습니다.

    제1차 모로코사건은 탕헤르사건이라고도 하며 프랑스가 특히 모로코의 내정개혁을 요구한 데 대하여 1905년 3월 31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모로코의 탕헤르항을 방문하여 모로코의 영토 보전과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고 프랑스에 반감을 가진 술탄을 원조하고 프랑스의 이권을 방해 하여 프랑스와 독일은 극도의 대립상태가 됩니다.

    1906년 1~4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알헤시라스 국제회의가 열리나 프랑스와 영국의 결속이 강해 독일은 고립되었고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진출이 합법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제 2차 모로코사건은 1911년 모로코의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을 위해 프랑스가 출병, 그해 7월 독일은 군함을 파견하여 프랑스군을 위협했는데 이 사건을 아가디르 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영국이 프랑스를 강력히 지지했기 때문에 독일은 프랑스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양국 간에 협정이 성립됩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독일에 콩고의 북부지방을 할양해주는 대신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승인했습니다.

    1912년 프랑스는 모로코를 보호국으로 하여 식민지 지배를 완성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2차 모로코 위기(독일어: Panthersprung) 또는 아가디르 위기는 모로코에서의 지역주민들의 반란에 프랑스군이 개입하자, 1911년 7월 1일 독일이 자국국민 보호를 구실로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港)에 전함 '판터호'를 파견하면서 발생했다.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