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3년상을 치를 때 자식이 부모의 묘를 지켰다고 하는데요..
조선시대에 황희 정승이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며 묘를 지키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하던데요. 모든 자식들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모두 묘를 지켰던 건가요? 아니면 그 중 한 명이 대표했던 건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보통 장남이 혼자서 하지 않고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대부들은 심지어 노비나 사람을 고용해 대신 시키고 상주는 산 밑으로 내려가서 체력회복을 하고 제사나 절기에 맞춰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고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유교식 삼년상보다는 불교식 장례를 치를 때가 더 많았다고합니다. 만 2년이나 묘를 지켜야 하는 삼년상과 달리 간단하게 화장하고 사십구재를 지내는 정도면 장례절차가 쉽게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삼년상이 공식 장례법으로 채택되었음에도 삼년상이 완전히 자리잡는 데에는 2백여 년이 걸렸다고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부모 삼년상의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하군요.
보통 시묘살이는 장남이 혼자서 하지 않고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대부들은 심지어 노비나 사람을 고용해서 대신 시키고 상주는 산 밑으로 내려가서 체력회복을 하고 제사나 절기에 맞춰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아래는 부모 삼년상의 구체적이 방식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은 성리학를 국시로 채택했다. 유교는 부모에 대한 효를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에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의 상례를 정성껏 모신다는 의미로 정착했다.
조선 초기에는 유교식 삼년상보다는 불교식 장례를 치를 때가 더 많았다. 만 2년이나 묘를 지켜야 하는 삼년상과 달리 간단하게 화장하고 사십구재를 지내는 정도면 장례절차가 쉽게 끝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삼년상이 공식 장례법으로 채택되었음에도 삼년상이 완전히 자리잡는 데에는 2백여 년이 걸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유교식 매장 상례(喪禮)에 어긋나는 불교식 화장을 비난하고 요승[8]에 속아 생기는 백성들의 잘못된 풍속으로 지적하는 내용이 등장할 정도였다.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상주는 금주하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버지의 상을 맞으면 참최복(斬衰服)을, 어머니의 상을 맞으면 자최복(齊[10]衰服)을 입는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어머니가 먼저 사망한 경우에는 만 1년만 장례를 치른다.
일단 상을 맞으면 상주는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고 관을 집 안에 모신 뒤 정해진 절차에 따라 곡을 하고 손님들을 맞으며 여러 번 제사를 지냈다. 그 과정이 실로 복잡하여 이 항목에서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다. 아무튼 복잡한 절차에 따라 관을 땅에 묻으면 상주는 무덤 옆에 여막(廬幕)이라는 작은 초막을 지어 기거했다. 여막에서 지내며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 식사를 올리기를 만 2년, 햇수로는 3년을 보낸다고 '삼년상'이라고 부른다. 상주는 외출할 때엔 방립을 착용했다. 모자 비슷한 갓인데 이를 쓴 이유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
안동에서는 어느 상주가 상복 차림으로 개고기를 먹는데 마침 지나가던 퇴계 이황의 제자가 보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호되게 그 상주를 불효막심하다고 욕하고 꾸짖었다. 그리고 스승에게 돌아와 이 이야기를 했는데, 퇴계는 오히려 "이 멍청한 놈아, 그건 삼년상 치르느라 버티는 동안 몸이 안 쇠약해지게 관리하는 거다. 삼년상 치른다고 버티다 몸 버리고 병 나면 그게 더 큰 불효 아니냐!"라며 제자를 나무랐고, 심지어 제자를 데리고 그 상주에게 찾아가서 사과하고 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지만 꽤 파격적이어서 원칙을 중시하다 본질을 잃어버림을 굉장히 경계하던 사람이라 가능한 언행이다.문종과 인종도 삼년상을 치르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문종은 모후인 소헌왕후의 삼년상을 치르고, 곧이어 아버지 세종의 삼년상까지 연이어 치르다, 몸이 쇠약해져 종기를 앓다가 삼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고, 평소부터 인종은 효심이 지극하여 장례를 치르면서 극단적으로 음식 먹기를 거부하다가 거식증에 걸려버렸다. 오죽하면 신하들이 "제발 밥 좀 드세요"하며 통사정을 하였을 정도. 그러다가 즉위한 지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나무위키 삼년상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대부들이라 하여 모두 삼년상을 정식으로 치른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시묘살이를 장남이 혼자서 하지 않고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하거나, 심지어 노비나 사람을 고용해서 대신 시키고 상주는 산 밑으로 내려가서 체력 회복 하고 제사나 절기에 맞춰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