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과 우산국은 엄연한 나라였나요?
지증왕인가 그때 우산국이랑 탐라국을 복속시킨것으로 알고있는데 그때 당시 탐라국과 우산국도 어느정도의 나라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탐라국은 지금의 제주도에 있던 옛나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초기까지 불려졌던 칭호입니다.
설화에 의하면 처음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등 3성의 시조가 모흥혈에서 나타나 그 자손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한과 같지 않으며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입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또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을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는 초옥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에 산다고 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조에는 주호라고 지칭하며 배를 타고 중국과 한에 내왕하며 교역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외관계는 제일 먼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백제와 밀접하여 476년 4월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치고 그 사신은 좌평의 관등을 받고, 498년 8월 공부를 바치지 않다가 백제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부를 바칠것을 약속합니다.
고구려와는 가옥을 수출하는 등 교역을 했으나 백제에 복속된 후 교섭이 두절되고, 신라와 662년 2월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이 와서 항복함으로 신라의 속국이 됩니다.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 678년 2월 신라 사신의 경략을 받았으며 이 후 신라와 계속 교섭하였습니다.
중국 당나라와는 661년 8월 왕 유리도라가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일본과는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 귀국할때 왕자 아파기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은 후 교섭이 활발해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녔으며 680년 9월 , 686년 8월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신라 말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 11월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938년 12월에 탐라국주 고자견이 태자 말로를 파견하여 입조, 고려로부터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 왕자의 작위를 받아 고려의 번국으로 독립적인 체제 유지, 1105년 고려의 지방행정구획인 1개의 군으로 개편되며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집니다.
1153년 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이 된 후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이 탐라의 행정업무를 관장하며 탐라국 체제는 없어지고 성주와 왕자의 관직만 남은 상태로 유지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4년 5월 성주는 좌도지관, 왕자는 우도지관으로 개칭, 1445년 6월 이것도 폐지되며 탐라의 귀족계급은 평민화됩니다.
우산국은 삼국시대에 울릉도에 있던 작은 나라로, 고구려나 백제, 신라처럼 체계를 갖춘 큰 나라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512년 신라에 정복당한 나라 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제22대 임금인 지증왕 때 우산국을 정벌해 복속시킬 계획을 세웠으며, 당시 하슬라주를 맡아 다스리던 이사부가 512년 정벌군을 이끌고 우산국으로 향했지만 이사부는 전면전을 치를 생각이 없었고, 항복을 받아낼 생각으로 뱃머리에 나무로 깎은 사자상을 세운 뒤 우산국 사람들을 위협했고 이사부가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풀어 우산국 사람을 밟아죽이겠다고 하자 우산국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항복했다고 합니다.
우산국 사람들은 신라에 항복한 이후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평화로히 살았으나 고려와 조선시대에 울릉도와 그 주변의 섬들에게 공도정책을 펼쳐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고 고려와 조선 조정은 울릉도가 육지에서 멀리 있어 관리하기 어려운 탓에 주민들을 육지에 와서 살게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완전한 중앙집권화 국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독립적인 체제를 갖춘 엄연한 나라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