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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노한잔
아메리카노한잔23.06.18

강릉단오제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가요?

강릉에서 해마다 음력 5월5일 단옷날이 되면 전.후로 해서 단오제 축제를 개최하였다고 하는데 그역사가 천년이 넘는다는데 맞나요? 정확한 단오제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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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릉단오제의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설, 한식,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절 중의 하나로
    (端)은 ‘처음’, ‘시작’이라는 말이고 오(午)는 ‘초닷새’라는 뜻이다.
    조상들은 단오를 1년 중 양(陽)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날로 여겨 으뜸 명절로 여겼습니다.

    강릉단오제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역사적으로 보면 강릉은 기원전 120년경 부족국가였던 동예가 있던 곳으로
    동예에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는데 10월에 추수가 끝나면 하늘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내고 축제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학자들은 강릉단오제가 이런 제천 행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출처: 강릉단오제 홈페이지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릉단오제에 대해..

    강릉에서는 매년 단오 무렵에 단오제라는 제의가 열린다. ‘단오굿’, ‘단양제’ 등으로 불리는 강릉단오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제의적 성격과 함께 축제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강릉단오제의 제의 대상은 주신인 대관령국사서낭과 그의 부인인 대관령국사여서낭이다.강릉단오제는 음력 5월 5일인 단오와 관련이 있긴 하나 본격적인 제의와 준비는 훨씬 일찍부터 시작된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관령서낭을 제사하며, 산로 안전(山路安全)과 풍작 · 풍어, 집안의 태평 등을 기원하는 제의이자 축제라고 할 수 있다. 단오굿 · 단양제(端陽祭)라고도 불리며, 단오날 행사로서는 가장 대표적인 행사이다.


    음력 3월 20일부터 제사에 소용될 신주(神酒)를 빚는 데서 시작하여 단오 다음날인 5월 6일의 소제(燒祭)까지 약 50여 일이 걸리는 대대적인 행사이다. 단오제의 제사일정은 다음과 같다. 3월 20일 제사에 쓸 술을 담그고, 4월 1일을 초 단오(初端午), 4월 8일을 재 단오(再端午) 또는 2단오라 하여 헌주(獻酒)와 무악(巫樂)이 있다.


    현재 신주 빚기 의례는 1988년 공개행사로 전환되면서 일정이 바뀌어 현재 음력 4월 5일부터 진행한다. 음력 4월 5일 신주근양[神酒謹釀, 신주 빚]에서 음력 5월 7일 송신제[送神祭, 신을 보내는 제사]까지 진행한다.


    4월 14일은 서낭신을 모시기 위하여 강릉을 출발하여 송정(松亭)에서 야숙하고, 4월 15일 3단오날에는 대관령서낭과 산신께 제사하고 신목(神木)과 서낭을 모시고 돌아온다. 이때에 강릉사람들이 구산(邱山)서낭당까지 마중을 나와 횃불을 밝히고 함께 여서낭당에 와서 서낭내외를 합사(合祀:둘 이상의 혼령을 한 곳에 모아 제사함)시킨다.


    4월 27은 4단오로 무당들에 의해서 굿이 행해진다. 5월 1일 5단오날은 본제가 시작되는 날로, 화개(花蓋)를 모시고 굿당으로 가서 굿과 관노가면극(官奴假面劇)을 행한다. 5월 4일은 6단오, 5일은 7단오로 무굿과 가면극이 있으며, 단오날을 본제날로 여기고 있다. 5월 6일은 8단오로 서낭신을 대관령국사서낭당으로 봉송하는 소제를 끝으로 약 50일 동안의 단오제는 막을 내린다.

    본격적인 제의와 놀이는 5월 1일부터 시작되는데, 단오굿과 관노가면극을 중심으로 한 그네 · 씨름 · 줄다리기 · 윷놀이 · 궁도 등의 민속놀이와 각종 기념행사가 벌어진다. 이때 영동일대와 각지에서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드는데, 예나 다름없이 지금도 대성황을 이루어 강릉시가는 일년 중 가장 혼잡을 이룬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그 역사와 예전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편적인 기록이 전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문인 남효온(南孝溫)의 문집인 『추강냉화(秋江冷話)』(1477)에 의하면 영동민속에 매년 3 · 4 · 5월 중에 택일을 하여 무당들이 산신을 제사하는데, 3일 동안 큰 굿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추강냉화』의 기록은 반드시 단오제를 지칭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시기 중 5월이 포함되어 있고, 또 그 의식이 대관령서낭제의 진행과 비슷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강릉단오제로 추정하게 한다. 또한,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1611)에도 그가 1603년(선조 36)에 강릉에 가서 단오제를 구경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대관령산신이 김유신(金庾信)이라는 이속(吏屬 : 관아에 딸린 구슬아치)의 말을 인용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도 단오제가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으로 강릉의 옛날 향토지인 『임영지(臨瀛誌)』를 취사(取舍)해서 경종 때 간행한 『강릉지 江陵誌』 권2 풍속 조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을 정벌하기 위해서 남정(南征)하였을 때 꿈에 중과 속인 두 신[僧俗二神]이 병졸을 이끌고 와서 구해주었다. 꿈이 깨어서 싸웠는데 이기게 되어 대관령산신에게 제사하고 치제(致祭)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로 보건대 대관령산신은 10세기에 이미 있었으며 당시에 왕이 제사한 것으로 보아 큰 신제(神祭)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런데 허균의 『성소부부고』나 현지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대관령산신은 김유신이며 서낭신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김유신이 명주(溟州 : 지금의 강릉)에 유학한 일이 있고 대관령산신에게서 검술을 배웠으며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나 『임영지』의 ‘승속이신’ 등의 내용을 보면, 대관령산신은 김유신 하나가 아니고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대관령산신으로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은 김유신이다. 이에 대하여 ‘승(僧)’은 국사 범일(梵日)이고 ‘속(俗)’은 김유신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실상부한 국제적인 전통행사이다 보니, 예전엔 중구난방에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던 행사장인 남대천 둔치를 전면 보수하고 행사장과 장사하는 곳을 완전 분리시켜 놓았고, 행사가 없는 평상시에도 주차를 금지하게 하는 등 강릉시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예전엔 행사 첫 날에만 하던 불꽃놀이가 이젠 첫 날과 마지막 날 밤에 화려하게 펼쳐진다. 단, 2009년 단오제 행사는 2010년에는 [[천안함]] 사태가... 그리고 2015년에는 [[메르스]]사태 때문에 제례행사를 제외한 모든 행사가 취소된 바 있다. 그러나 5년 후 이번엔 [[코로나19]]사태 때문에 제례행사를 제외한 모든 행사가 온라인으로 진행하다가 22년도 코로나 방역지침 완화로 정상운영 하면서 남대천 단오장 방문객이 전년 대비 '''1,041%'''상승하였다.


    다만 이렇게 문화재로서의 관리에는 철저히 노력하는 반면, 외부 관광객 유치에 치중하느라 지역민들이 즐길 수 있는 요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진 감이 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훨씬 지역적이고 친근한 동네 잔치 같은 느낌이었지만, 2000년 중반 이후로는 지역과는 오히려 서서히 유리되면서 5일장 이상도 이하도 아닌 어중간한 행사가 되고말았다. 덕분에 축제 참가자의 숫자가 급락하고, 이렇게 구매층이 줄면서 판매자도 줄고, 결국 그렇게 축제가 동네 잔치보다는 문화행사에 더 비중이 쏠리게 되었다.


    문화제 지정 이전에는 단오장 주변의 교통이 현재보다 훨씬 지옥같았지만 단오 장거리에 강릉시내에서 구하기 힘든 게임 카트리지 등을 판매하는 장사꾼들도 있었다. 2016년 기준 단오장에는 장사꾼들이 판매하는 품목들이 거기서 거기다보니 그때의 기억하던 강릉사람들은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 또한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당시, 중국 언론에서 단오를 뺏어간다느니 하고 우기며 한국을 비난했다.


    단옷날(음력 5월 5일)부터 열리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 시작점은 대관령 산신제다.


    허균이 34세이던 1603년(선조 36) 여름, 당시 수안군수를 역임하고 모친과 함께 외가인 강릉 사천의 애일당에 내려와 약 4개월 간 머물렀을 때 강릉단오제를 보았다. 그에 의하면 명주 사람들이 5월 길일을 택해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장군을 괫대와 꽃으로 맞이하여 부사에 모신 다음 온갖 잡희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하였다. 신이 즐거우면 하루 종일 괫대가 쓰러지지 않고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이것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나 한재가 있다고 말한 수노(首奴)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고 있으며, 이 말을 듣고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 그 날 가서 보았더니 과연 괫대가 쓰러지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고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을 치며 춤을 추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