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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재규어247
푸른재규어24723.07.01

경성방직주식회사는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나요?

안녕하세요? 경성방직 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자본에 의해 설립된 면방직회사인데요~일본인들의 탄압과 감시가 철저했을 텐데 어떻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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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성방직은 1919년 10월 5일 김성수(金性洙)를 비롯안 21명의 발기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회사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1주당 50원씩 2만 주의 주식을 발행하여 100만원의 자본금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처음 납입된 자본금은 25만원이었다. 초대 사장은 박영효(朴泳孝)였으며, 전무 박용희(朴容喜)와 지배인 이강현(李康賢)이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했다. 총독부에 제출한 창립취지서에 따르면, 영업의 주목적은 제직(製織) 및 방적(紡績)의 생산과 판매였지만,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려는 것에만 목적을 둔 것은 아니었다. 조선 공업의 발달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경제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회사 설립 직후 공장 설비를 도입하기 위해 전무 박용희와 지배인 이강현을 일본 나고야[名古屋]로 보내 도요다직기[豊田織機] 회사에 직기 100대를 발주하도록 하고, 원료인 면사(綿絲)는 오사카[大阪]의 도매상인 야기[八木] 상점과 다이니혼[大日本] 방적 주식회사와 구매계약을 체결하였다. 11월에는 기술자인 현득영(玄得榮)과 유덕호(柳德浩)를 나고야에 보내 기계 조작기술 배우도록 했다. 이듬해인 1920년 3월에는 영등포의 토지 5,000여 평을 구입해 공장 건설에 착수하였다.

    1923년 4월, 비로소 첫 광목 제품의 생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후발 주자로서 이미 광목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던 일본 제품과의 경쟁은 쉽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 속에 판로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 1925년 첫 흑자를 기록했으며, 1927년에는 주주들에게 이익배당을 실시하였다. 경성방직은 사업이 안정화되면서 적극적으로 사업 확장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3월 영등포 공장을 증축하고, 1925년에 직기 20대를 증설한 것에 이어 공장 증축과 함께 104대를 추가로 도입하였다. 이로써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출 수 있었으며, 1929년에는 만주 시장까지 판로를 확대하였다.


    1930년대 이후 꾸준히 공장의 규모를 확대하여 1932년 총 672기의 직기를 보유하게 됐으며, 1933년에는 자본금 100만원의 불입도 완료되었다. 1935년에는 자본금 200만원을 증자해 방적공장의 설립을 추진하여, 1936년 대규모의 방적 공장까지 갖추게 되면서 면사와 면포를 일괄 생산하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39년에는 만주 현지에 공장을 세워 해외 자본금 1,000만 원의 ‘남만 방적(南滿紡績)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41년 12월 만주 소가둔(蘇家屯)에 첫 해외 현지 공장을 준공하게 된다.

    일제의 전시체제 아래서도 경성방직의 성장은 계속되어 해방 이전까지 남천·은율·평양에 3개의 조면 공장과 의정부의 제사·견직 공장을 운영하였고, 면방직업 외에도 연관 업종으로 분야를 확대하여 양평동의 고무공장·쌍림동의 봉제공장·시흥의 염색가공공장 등을 운영하는 민족 최대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경성방직은 민족자본을 통해 설립되었고, 한국인 본위의 운영을 고집한 대표적인 민족계 기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기업의 성장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에 대한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해방 이후 경성방직은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남만 방적의 운영이 불가능해졌고, 북한 지역에 있었던 3개의 조면 공장도 가동을 중단해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전쟁을 겪으면서 영등포 공장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든 시설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등포 공장을 중심으로 회사의 재건에 성공하였고, 1970년 7월에는 회사명을 '(주)경방'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