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킴 간첩 조작사건은 어떤 사건이었나요?
전두환 정부 시절 발생한 수지킴 간첩조작사건은 어떤 사건을 말하는 것인가요?
이게 전두환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또 어떤 결과를 초래한 사건인지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은 윤태식이 부인 수지 김을 살해하고 저지른 월북 미수 사건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여러 사건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명백한 피해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필요에 따라 그녀를 간첩으로 내몰았고 이는 결국(결과적으로는) 반공주의를 운운했던 당대 정권들이(혹은 국가기관) 가지고 있던 안보관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서 그녀의 유족들, 아니 자국의 안보마저 엄청난 위해(危害)를 초래하게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요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은 윤태식이 부인 수지 김을 살해하고 저지른 월북 미수 사건,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여러 사건들을 의미한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명백한 피해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필요에 따라 그녀를 간첩으로 내몰았고 이는 결국(결과적으로는) 반공주의를 운운했던 당대 정권들이(혹은 국가기관) 가지고 있던 안보관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서 그녀의 유족들, 아니 자국의 안보마저 엄청난 위해(危害)를 초래하게 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 전개 과정
사건의 시작은 일반적인 살인 사건이었다. 1987년 1월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나간 윤태식은 사업자금 문제로 아내 김옥분과 말다툼을 하다가 흥분해 김옥분을 우발적으로 살해했다.
김옥분은 충북 충주의 1남 6녀의 가난한 농촌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루 일당 540원인 버스 안내원을 시작으로 서울의 공장을 거쳐 미8군 술집, 일본인 대상 유흥 접객원 등의 거친 일을 하다가 홍콩 남자를 만나 결혼하면서 영국령 홍콩으로 이민을 갔지만 곧 이혼하고 또 다른 홍콩 남자를 만났지만 오래 못 갔는데 그러다가 만난 사람이 윤태식이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 와서 겉이 번지르르한 젊은 남자가 감언이설로 다가서자 고마운 마음에 덜컥 결혼한 것이 화근이었지만 6세 연하인 윤태식은 자격지심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폭력을 휘둘렀고 결국 채 몇 달도 함께 살지 않은 1987년 1월 3일 아내를 살해하고 말았다.
후일이 두려워진 윤태식은 싱가포르로 날아가 북한 대사관에 망명(월북)을 신청했지만 아무리 체제경쟁이 심해서 누구라도 월북하면 선전용으로 써먹던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살인범을 선전용으로 써먹을 가치는 없으니 당연히 북한 대사관은 윤태식을 쫓아냈다. 그러고 나서 찾아간 곳은 미국 대사관이었는데 당연히 여기서도 쫓겨났고 미국 대사관은 한국 대사관에 연락해 행동이 수상한 자가 왔다 갔음을 알려줬다. 결국 윤태식은 싱가포르 한국 대사관으로 끌려왔는데 이 때 살인 혐의를 피하기 위해 아내가 간첩이었다는 시나리오를 지어냈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 제21조 3항에는 이 법의 죄를 범한 자를 체포할 때 반항 또는 교전상태하에서 부득이한 사유로 살해하거나 자살하게 한 경우에는 체포한 경우에 준하여 상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생포해야 하지만 죽여 놓고 반항 또는 교전상태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인 셈이다. 윤태식은 영화광이었고 시나리오도 첩보영화들을 보고 고안한 것이었다.
그 시나리오는 "사실 아내는 '수지 김'이라는 북한의 간첩으로, 빚쟁이들에게 잡혀 있다며 싱가포르로 자신을 불러내 북한 대사관으로 끌고 와 납치하려 했고 자신은 탈출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한국 정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1987년 당시의 한국은 전두환 정권 타도로 시끄러웠고 제5공화국 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쏠리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윤태식의 시나리오를 이용하기로 했다. 즉, 사건의 진실인 '살인+자진 월북(시도)' 사건을 도리어 '납북' 사건으로 조작하였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장세동의 지휘 아래 사건 조작이 전개되었다. 그렇게 '반공, 반공' 하면서 정작 진짜 월북하려던 인간은 봐주고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간첩으로 만드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살인자와 안기부의 더러운 공모
윤태식은 안기부 해외 공작원들로부터 입국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철저히 교육받았으며 실제 입국할 때의 보도 자료를 보면 기자들의 질문에 "이제야 서울에 온 것 같습니다"라고 울먹이는 어조로 답하고 심정을 묻자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너무 무서워가지고요 말을 못하겠어요"라는 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홍콩에서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있었다. 시체를 침대 밑에 숨겼는데 당연히 부패되어 냄새가 났고 옆집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여 시체를 발견했다. 외부의 침입 흔적이나 제3자의 족적이나 지문, 모발 등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집안에서도, 피해자 부부의 행적과 지인에 관한 수사에서도 북한이나 정치, 사상 등과 관련된 그 어떤 자료/문서/기타 흔적은 없었만 한국 정부는 '대공사범(국가안보 관련 사범)'이라는 핑계로 홍콩 경찰의 정당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다.
한편 윤태식이 스스로 월북하려던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 역시 곧바로 대공분실로 끌려가 몽둥이 찜질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모든 사건의 전모와 함께 북한으로 망명하려 했다는 것까지 실토했다. 이 사건을 다룬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는 윤태식을 직접 패던 안기부 직원이 "이 새끼 이거 완전 개구만?"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원칙대로라면 윤태식은 이 시점에서 살인 및 월북 시도 혐의로 감옥에 보내져야 했지만 그러면 간첩 (조작)사건 작전이 망쳐진다는 이유로 그냥 출국만 막고 살인범을 그냥 풀어주고 방치했다.
피해자인 김옥분은 억울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서 미인계를 쓴 희대의 여간첩이라고 왜곡 선전되었고 언론들은 안기부의 지시대로 온갖 소설을 휘갈겨 댔다. 한국 언론은 ‘여간첩 수지 김’ 이야기를 연일 대서특필했으며 심지어 당시 방영 중이던 KBS 드라마 <남십자성>은 중간에 ‘수지 김’이라는 여간첩 배역을 만들어 투입하기까지 했다. 물론 진실이 밝혀진 홍콩에서는 ‘수지 김은 간첩이 아니며 윤태식에 대한 납치 흔적은 없다’라는 보도가 계속 나왔지만 보도통제가 살아있고 인터넷도 없어서[7] 외신을 접하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보니 한국에서는 그런 진실이 알려지지 않았다.피해자 유가족의 피해
피해자 유가족들은 온 가정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김옥분의 셋째 여동생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에서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뉴스를 보고 고향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니가 "지금 전화하지 마라"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때 친정집에는 이미 헌병들이 찾아온 상황이었으며 헌병들은 김옥분의 엄마와 오빠를 끌고가서 '당신 딸이 간첩이었다는 걸 실토해라', '언제 어디서 공작금을 받았는지 실토하라'며 60세가 넘었던 노모를 군화로 짓밟았다. 뿐만 아니라 그때 김옥분의 어머니가 입고 있던 코트가 공작금의 증거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둘째 여동생은 남편, 3살 아들과 함께 끌려왔고 고문을 당하는 사이 가족들조차도 안기부에게 세뇌당하기 시작했다.
고통은 대를 이어 계속됐다. 간첩의 가족이라며 연좌제로 세상의 멸시를 당했고 실제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가혹행위를 수반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간첩의 가족'이기 때문에 보안감찰이라는 명목으로 안기부의 감시가 일상화되었으며 직장과 학교에 틈만 나면 연락을 취해 행적을 캐물으면서 민폐를 끼쳤고 당연히 그들이 매사에 눈총을 받게 만들었다. 당연히 유가족들은 제대로 된 일상생활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해져 직업을 가지기 어려웠고 결혼 생활도, 학교에 다니기도 힘들었으며 신분을 숨기고 연락을 끊어야 했다. 어머니는 이로 인해 실어증을 얻어 1997년에 사망했고 나머지 형제자매 5명도 고초를 겪었다.
전매청(현재 KT&G)에 다니던 큰언니는 사건 직후 해고된 뒤 정신질환자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다가 그해 겨울에 타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큰언니의 남편도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1988년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고 폐인이 되었다. 오빠도 주위의 비인간적 멸시 속에 술에 의지하다 2000년에 석연치 않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목격자에 따르면 대형 트럭이 2번이나 후진하면서 아예 깔아뭉갰다고 한다. 윤태식을 형사고발한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여동생 4명 중 3명은 이혼당했고 그 자녀들도 간첩의 가족이라며 학교에서 집단괴롭힘을 당해 자퇴하고 가출, 방황했는데 그 중에서도 셋째 여동생이 가장 비참했다. 당시 그녀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김옥분이 남파공작원이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시댁 식구들이 몰려와서 언어/육체적으로 폭행하고 강제로 이혼당했다. 당시 3살이었던 아들은 남편이 양육하기로 했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남편의 가족(고모들)이 연좌제의 피해를 입을 것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남편 몰래 아이를 절에 내다버렸다. 이로 인해 아이는 8년이나 부모를 모른 채 고아 아닌 고아 신세로 살았다고 한다.
국가안전기획부와 윤태식은 아내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그녀의 가족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까운 친척마저 지옥으로 떨어뜨렸다.윤태식의 활동과 윤태식 게이트의 서막
사건 이후 안기부 직원들과 친분을 맺었는지 윤태식을 감시만 했고 윤태식은 아내의 죽음과 관련해 구속조치 같은 건 받지도 않은 채 사기 행각을 일삼다가 형사 처벌을 받으면서도 안기부의 묵인과 도움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하면서 살고 있었다.
윤태식은 자금을 마련해 영화 배급 사업에 손을 댔다가 쫄딱 망한 뒤 본인 회사의 직원들이나 주변 여자들을 통해 얻은 회사원 20명 등의 신분증, 재직증명서를 위조해 신용카드 수십 장을 발급받아 5개월 동안 수억 원을 사용하다가 1994년부터 2년 6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8] 이 밖에도 중국산 위폐개수기를 자신이 개발한 것처럼 속여 금융기관에 납품될 제품의 공급권을 주겠다며 돈을 빌려 가로채거나 중국 푸둥지구에 건설 사업을 따게 해 주겠다고 했다가 흐지부지되어 사기 혐의를 받는 등 사기 행각을 지속해 왔으며 적발되어도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재기했다.
1996년 7월에 출소한 윤태식은 교도소 수감 시절 알게 된 교도소 동료로부터 지문인식 관련 사업을 하는 회사를 소개받아 동업을 했는데 이 동료로부터 모 언론사 사장 부부를 소개받아 이들을 끌어들여 이전 동업자와 결별하고 1998년에 ‘패스21’이라는 벤처기업을 창업했다. 패스21의 초기 자본은 이들 부부 중 웨딩, 가구 관련 사업을 하던 부인이 대부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두 아들도 패스21의 감사와 이사를 지내는 등 이들은 패스21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고 윤태식은 위에서 언급된 교도소 동료로부터 김모 전 국회의원을 소개받아 그를 통해 정관계 로비를 진했다.
오랜 기자 생활로 정관계에 발이 넓었고 언론사 사장이었던 김모 사장과 전 국회의원의 비호를 통해 윤태식의 패스21은 재경부 장관을 지낸 인사를 대표이사로 영입하기도 했으며 정통부 장관은 물론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기술 설명을 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러한 로비와 더불어 90년대 후반에 불어닥쳤던 벤처 열풍으로 인해 패스21의 장외 주식은 15만 원에서 30만 원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윤태식은 장부상 수백억 원 대의 부자가 되었다. 심지어 김모 사장이 고등학교 동창인 이종찬 당시 국정원장에게 부탁해 윤태식이 국정원에서 기술시연회를 열기도 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윤태식은 주목받는 사업가로 아침 방송에도 출연했다.의혹 제기와 재조사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라고 아무리 봐도 내세울 게 없던 윤태식이 갑작스럽게 벤처 사업가로 잘 나가는 것을 보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결국 2000년 주간동아에서 이정훈 기자가 처음으로 이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이정훈 기자는 1994년 주간조선에 근무할 때 부장으로부터 이 사건을 전달받은 뒤 당시 싱가포르 대사였던 이장춘 대사와 국제전화로 통화를 하고 수지 김의 유족들을 만나면서 진실을 알 수 있었다. 단 당시에는 아직 안기부의 힘이 막강한지라 기사가 나가지 못했고 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보도할 수 있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자세히 취재하여 방송했다.
수지 김의 유족들은 간첩 누명 자체는 정권 차원에서 조작된 거니 당장 어찌할 수 없다고 쳐도 최소한 윤태식의 살인 행위만큼은 사전에 알고 있었으니 감옥으로 보내졌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방송 등을 통해 윤태식이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았다는 것을 알게 된 유족들이 분노해 검찰에 수사 요청을 했지만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했고 전해철이 유족들의 법률대리인을 맡아 노력한 끝에 그 과정에 안기부의 압력과 방해 공작이 있다는 의혹 등 모든 진실이 결국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때 국정원과 윤태식, 그리고 정치권의 커넥션이 폭로되었다. 국정원은 윤태식을 철저하게 입단속시켰으며 1991년부터 출국을 금지하고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고 윤태식도 이를 이용해 잘 먹고 잘 살았을 뿐 아니라 벤처열풍을 틈 타 패스21 주식을 여러 국회의원들, 그리고 언론 각계 인사들에게 뿌려대며 로비를 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벤처 3대 게이트에 번외로 들어가기도 하는 '윤태식 게이트'라는 헬게이트를 소환했는데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공소시효 만료를 50일 남겨두고 간신히 윤태식을 구속한 검찰은 홍콩 경찰들에게서 받은 수사자료를 토대로 윤태식이 살인범이자 사기꾼이며 여기에 국가 기관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 사건에 관여한 공직자들은 한 집안 사람들 모두의 인생을 망쳐 놓고도 공소시효가 매우 짧은 현행법 때문에 처벌은커녕 재판조차 받지 않았고 분노한 유족들은 국가와 윤태식, 그리고 장세동을 비롯한 과거 국정원 고위관계자들에게 손해배상소송을 걸었다.
법원은 죄질이 너무 나쁜 데다 반성도 안 하고 있으니 중형을 받아 마땅하다며 윤태식에게 살인죄로 징역 12년, 기타 비리로 징역 3년 6개월 등 징역 15년 6개월을 선고했으며 국가가 유족들에게 42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명했다.[18] 이 배상금 액수는 당시 정부가 배상한 손해배상 사건 중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큰 금액이다. 국가도 장세동을 비롯한 안기부 간부들과 윤태식에게 구상권을 행사했고 결국 대법원은 장세동에게 9억, 윤태식에게 4억 5천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윤태식의 재산은 이미 공중분해되었고 장세동은 이미 시가 8억 원대의 빌라를 처분하는 등 재산을 빼돌린 뒤였다. 현재까지도 아직 남은 구상금 6억여원을 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수지 김 사건은 단순한 실수’라는 등 반성보다는 합리화하기에 바빴다. 장세동 재산, 없나? 숨겼나? 물론 이 돈을 다 받았다고 해도 유족들이 그동안 받아온 모욕과 고통이 위로될 리는 없을 것이며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유족들은 재조사 이후에야 수지 김이 묻힌 곳을 홍콩 현지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유해를 수습할 수는 없었는데 홍콩 당국에서 무연고자 시신으로 처리해서 다른 무연고자 시신들과 함께 한 곳에 모아서 묘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묘지의 흙을 고향으로 가져와서 고인의 어머니의 묘지에 뿌렸다고 한다.재조사의 영향
결국 국정원은 2003년 8월 21일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안전기획부가 사건을 조작한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다"며 사망한 김옥분과 유가족 그리고 국민에게 공식 사과를 했지만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뒤였다.
이 사건으로 국정원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지나면서 좀 나아졌나 싶었던 인식이 다시 극심하게 나빠졌을 뿐 아니라 신뢰도가 바닥을 기면서 해결해온 사건들도 조작 아니냐며 의심받는 등 궁지로 몰렸다. 특히 이 사건으로부터 10개월 뒤에 제기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음모론은 수지 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직후 절정에 달했다. 물론 철저하게 자업자득이었다.
국가가 개입해서 부당하게 개인은 물론이고 그 주변인들의 인생까지 망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소시효가 고작 1~3년 정도밖에 안 되어 관련자 대부분을 형사기소하지 못해서 이들은 아무런 처벌은커녕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국가가 저지른 반(反)인륜적 범죄에는 시효를 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