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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

태국 혁명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1932년 왕정타도를 외치는 태국 혁명은 왜 일어나게 된건가요?

군부와 문민이 손을 잡고 라마 7세가 퇴위 되었다고 하는데 왜 혁명이 일어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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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0년에 라마 5세가 죽은 뒤 장남 와짜라웃이 라마 6세로 등극했지만,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고 낭비만 일삼아 나라에 재정적자를 안겼고, 1925년에 후사없이 죽자 동생 프라차티뽁이 물려받아 라마 7세로 등극했다. 그는 영국 이튼스쿨 출신에 프랑스 군사교육까지 받은 엘리트였으나 국정 수행능력은 미흡했다.

      1920~30년대 대공황으로 태국 경제가 휘청이고 민족주의라는 폭풍이 일었다. 이 영향 때문에 1932년, 군부가 일으킨 이른바 '시암 혁명'을 계기로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변화했고, 국명 역시 '시암'에서 '타이'로 바뀌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놀랍게도 국왕이 아닌 '피분송크람'이라는 인물이었다.

      쁠랙 피분송크람(이하 송크람)은 '시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주도했으며, 시암 최초의 헌법을 공포했다. 라마 7세는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 군대의 통제권마저 지속적으로 잃었고,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으며, 정부와 왕실은 사이가 틀어졌다가 마지못해 입헌군주국 헌법을 승인했다. 1934년에 영국으로 떠난 국왕은 1935년에 무력함속에서 스스로 퇴위하여 1941년에 객사했다.

      정부는 스위스에서 유학중이던 어린 아난다를 라마 8세로 새로 추대했지만, 국가는 완전히 송크람의 것이 되었다. 그의 통치스타일은 독재적이었으며 출판물과 방송 등은 검열을 받았고, 민족의회는 새로 만들어졌으나 유명무실하여 그들을 견제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고, 1938년 총리가 됐다.

      송크람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내세워 쿠데타를 벌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고, 오히려 독일 제3제국과 일본 제국을 모티브로 하여 전체주의적 민족주의 국가로 만드려 했다. 명목적으로 송크람과 삐디 두 명이 정치를 이끌던 것에서 더 나아가 완전한 독재를 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처형되거나 망명했다. 화교계에 대한 탄압 또한 이어졌다.

      1939년에는 국호를 '시암'에서 '쁘라텟 타이'(자유의 나라)로 바꿨다. 그는 민족주의적 이념으로 타이족의 단결을 강조하는 한편 화교들을 대상으로 태국인과의 결혼 정책을 장려하여 정신적인 면에서 태국화했다.

      1940년에는 나치 독일에서 영감을 받아 국토의 회복 계획을 내놓으며 1941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까지 겪었다.[27] 1941년 12월에는 일본군이 영국령 미얀마를 침략할 길을 열어달라고 태국에 요청했는데, 이는 사실상 태국을 침략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태국 사람들이 저항했으나 일본군에게 패퇴한 후 개전 몇 시간 만에 휴전을 요청했고, 1942년에는 일제의 강압 아래 완전히 동맹을 맺었다. 결국 1942년 1월 25일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마지못해 했으며, 친일 총리 송크람의 독재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1944년 8월이 되자 일제는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자유 타이 운동 같은 반일, 반송크람 조직이 들고 일어섰다. 게다가 태국이 연합국의 폭격까지 받자 송크람은 지지를 잃어 정부가 와해되었다. 결국 송크람이 사임하며 새로운 총리가 임명되었고, 전쟁을 계속하다가 1945년 9월 2일 평화 선언을 발표했다. 태국의 새 정부는 반일적인 정서를 통해서, 연합국으로부터 전쟁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국토 회복 계획 중에 확장했던 국토도 모두 반환했다.[28]

      새 정부가 군주제를 부활시키면서 라마 8세가 고국에 돌아왔으나 1946년에 그는 의문의 총기 사고로 승하했다. 이에 동생 푸미폰 아둔야뎃이 라마 9세로 등극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이후에도 사회 혼란이 지속되어 1947년 11월에 송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듬해에 다시 총리가 됐다. 그럼에도 6.25 전쟁 등을 계기로 미국의 원조를 받아들여 경제호황을 맞고 공산화 저지선으로 변모시켜 다시 지지를 얻었으나, 오히려 미국의 원조는 부정부패를 더욱 키웠다. 미국은 송크람 내각에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라고 계속 촉구했지만 송크람은 부정선거 등으로 이를 씹었고,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를 감행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그러나 1957년 9월에 사릿 타나랏이 쿠데타를 성공시켜 송크람 정권을 무너뜨렸고, 송크람과 그의 부하들은 일본 등 국외로 몸을 피했다. 1963년에 사릿 타나랏 총리가 숨을 거두자, 그 자리를 동료였던 타놈 끼티까촌 장군이 물려받았다. 당시 베트남 전쟁 등으로 동남아에 공산화의 물결이 뻗쳐오자 미국 정부는 타놈에게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1968년에 헌법을 고치고 의회도 새로 짰으나 1971년에 급작스레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강력한 반공독재를 행사했다.

      출처: 나무위키 태국/역사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0~30년대 대공황으로 태국 경제가 크게 휘청이면서 군부가 일으킨 시암 혁명을 계기로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변화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012년 레드불 창업자 손자의 뺑소니 사고에 대한 부실 대처와 태국의 원내정당인 미래전진당(พรรคอนาคตใหม่, Phak Anakhot Mai)의 해산,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후신인 공민역량당의 독재와 실정, 태국의 근대적 전제군주제와 라마 10세의 사생활 문제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대규모 시위이다. 안그래도 정체한 태국 경제가 코로나 19로 막대한 타격을 입어 불평등과 실업이 심화된 상황에서 2020년 7월 태국 방콕 경찰청이 경찰 뺑소니 사망 사건을 내고 달아난 것도 모자라 해외로 도피하여 향락을 즐겨 태국 국민들을 분노케 했던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인 오라윳 유위티아(วรยุทธ อยู่วิทยา)가 뇌물을 주고 한화로 2000만 원 정도의 벌금만 낸 뒤 풀려나서 기소, 인터폴 수배, 체포영장 발부를 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언론에 내놨고, 이 발표 이후 태국 국민들은 분노했다. 태국 국민들은 시위를 시작했고, 반응이 거세자 태국 정부는 진상조사위원회 설치를 약속했다

      -출처: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