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의 실리외교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나라와의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했다는데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광해군은 전통적인 사대 관계인 명나라와 새롭게 부상하는 후금 사이에 실리외교인 중립 외교를 추진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면서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는 왜란 후 국력이 한층 쇠약해졌습니다. 반면에 이 틈을 이용하여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 사회에서는 급속한 통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명나라는 후금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러자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1619년 1만 3천 명나라의 원병을 보냈으나, 강홍립에게 정세를 파악하여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 지시하였습니다.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후금과 휴전을 맺었고, 그 후 명나라는 모문룡 부대를 압록강 입구의 가도에 주둔케 하였으나, 조선 측은 그들의 식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과 친선을 도모하여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습니다.
이와 같이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당시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게 대처한 실리외교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조반정의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지는 해였고 금나라는 기세를 타고 오르는 신흥국이었습니다.
당시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이라하여 명나라에 은혜를 갚아야한다는 것이 유교사상에 찌든 조야의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군요청에 일단 응하고 지휘관을 따로 불러 형세를 보고 섣불리 명나라와 금나라의 전쟁에 끼어들지 말라고 합니다.
즉, 중립을 지키고자 했는데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지고나서는 철저히 금나라, 즉 후의 청나라를 배척했기 때문에 병자호란까지 당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