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전쟁은 어떠한 이유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인가요?

2023. 02. 22. 17:33

여몽전쟁은 오랜시간에 걸쳐서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여몽전쟁은 어떠한 이유에서 일어난 전쟁인지 궁금합니다.


총 7개의 답변이 있어요.

훈훈**** 전문가 인증 뱃지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친 몽골 제국의 고려 침입으로 촉발된 전쟁으로 대몽항쟁, 항몽전쟁 등으로도 불립니다.

여몽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몽골제국은 저고여라는 장군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합니다.

형제의 맹약을 맺고, 엄청난 조공을 요청합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북방의 오랑캐가 기어오르고 있으니 고려 입장에서도 난감합니다.

그러던 중에 저고여는 고려의 사신으로 파견되고, 다시 몽골제국으로 갈려던 찰나에,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산적들을 만나서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산적들의 옷은 모두 고려의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고려는 금나라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였지만, 몽골제국은 고려의 말을 묵살하고, 이에 몽골제국은 고려와 모든 국교를 단절하고, 고려를 침략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몽골제국의 1차 침략으로 9차까지 침략하면서 고려의 항복으로 끝난 고려 전쟁사 최악의 암흑기로, 그야말로 전 국토가 잔혹하게 짓밟혔던 전쟁입니다.

2023. 02. 2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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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전문가 인증 뱃지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을 위한 어떤 배경은 있었겠으나

    이 또한 침략을 위한 명분 정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땅을 정복하겠다는 몽골제국의 욕심으로 비롯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친 몽골 제국의 고려 침입으로 촉발된 전쟁. '대몽항쟁', '항몽전쟁' 등으로도 불립니다. 여요전쟁과 달리 고려의 항복으로 끝난 고려 전쟁사 최악의 암흑기로, 그야말로 전 국토가 잔혹하게 짓밟혔습니다. 이에 몽골 제국은 여진족의 동하와 동맹을 맺고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에 들어왔다. 고려도 거란 잔당 소탕을 위해 군사를 동원, 몽골 제국-동진 연합군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였다. 이것이 강동성 전투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몽골 제국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나 베푼듯이 행동하였고, 해마다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 몽골 제국의 사신들은 고려에 들어와 깽판을 부렸다. 이러니 고려에선 당연히 반몽 정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흘러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제국 사신 저구유(저고여, 箸告與)가 귀국하던 도중 국경에서 자객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 제국에서는 고려의 소행이라 주장, 고려에선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져 결국 국교 단절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몽골 제국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현재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 중에는 왜 몽골이 끈질기게 고려를 복속시키려고 시도했는가가 있다. 엄청난 영토를 지닌 몽골 제국에게 고려는 한줌도 안되는 땅이고, 몽골을 적극적으로 위협할만한 세력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땅을 정복하겠다 라는 야심이라기엔 전투에서 압살해놓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놔두고 다른곳으로 군대를 돌린 나라들도 몇몇 존재한다. 몽골제국 동부의 장군들이 독자적으로 침공했다는 설이 잠시 돌았으나 원사에 의해 부정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여몽전쟁

    2023. 02. 22.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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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려는 그 당시 무신들이 집권한 시기로, 왕권이 약화되고 내정이 그다지 평안치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40여 년 가까이 무려 9차례 침입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몽골은 초원 내륙에서 일어난

      민족이라 수군이 없습니다. 즉, 바다에 대해 무지하죠. 게다가 배도 없고 건조할 능력도 없고요. 그런 약점을 파악한 최우는 개경과 그리 멀지 않은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했어요. 그 덕분에 몽골이 2차 침입했을 때 섣불리 강화도로

      건너지 못했어요. 하지만 무신 정권과 왕조만 무사하지, 한반도는 그야말로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어 몽골군에게

      철저히 유린당했죠. 물론 김경손, 송문주, 박서, 김윤후 등과 같이 백성들이 몽골군을 몇 번이나 물리친 적은 있죠.

      2023. 02. 22.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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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가 최씨의 무단정치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 등장하여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 칭기즈 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으로 군림합니다.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 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 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킵니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으로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느아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됩니다.

        이에 몽골족은 여진족의 동진국과 동맹을 맺고 거란족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무찔렀고,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에 큰 은혜라도 베푼 듯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조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25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고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고 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고 주장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지고 국교 단절에 까지 이르렀고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게 됩니다.

        2023. 02. 22.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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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골은 징기스칸에 의해 막강한 군사제국으로 성장합니다. 대팽창의 시기가 오랜시간 계속되었습니다. 화북의 요와 금을 멸하고 고려와 국경을 맞닿았습니다. 남송을 치기 전 송과 외교적으로 돈독한 고려를 먼저 쳐서 후벙의 화근을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때는 무인정권의 시기였는데 무신정권은 몽골군이 수전에 약한 것을 간파하고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커져 결국 항복하고 강화를 하게 됩니다. 몽골제국에 충성하고 고려는 부마국 즉 사위의 나라가 됩니다. 고려 항복의 성과를 내세워 쿠빌라이가 대칸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쿠빌라이는 이후 남송까지 정복하여 원이라는 국호를 채탁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2023. 02. 22.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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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여몽전쟁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조선 왕조와 일본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 간 충돌로 이루어진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일본의 3대 삼군 총대장인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적인 목적과, 조선의 왕권과 토속적인 문화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내부에서의 권력 싸움에서 이긴 뒤, 한반도를 정복하여 전성기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또한 그는 조선의 왕권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왕조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적 대비를 강화하고, 국민을 동원하여 적의 침입을 막으려 애썼습니다.

            이렇게 양국의 이해관계와 이익이 대립하면서 전쟁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 기간 중에는 많은 인명과 재산이 피해를 입었으며, 한반도 전역이 큰 피해를 본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2023. 02. 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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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몽전쟁(如意寺之戰)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발생한 임진왜란 중 일어난 전투 중 하나입니다.

              이 전쟁은 당시 중국의 멍저우(明朝)와 일본의 토요타미(豊臣) 정권 간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일본 측은 아시아에 대한 침략의 꿈을 품고 있었고, 이에 대한 멍저우의 경고와 군대 강화에도 불구하고 1592년 7월에 임진왜란을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여러 곳을 침략하며 한반도를 지배하려 했고, 이에 대항하여 조선(한국)군과 멍저우군이 합동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여몽전쟁은 1597년 5월에 일어났으며, 그 원인은 일본군이 조선의 서북지역을 침공하여 거주민들을 학살하고, 부족한 식량과 물자를 강제로 수탈하는 등의 수법을 사용하면서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군은 일본군을 막기 위해 여몽(如意)에 세운 요새를 지키기 위해 여러 차례의 싸움을 벌였습니다. 결국, 조선군이 일본군을 격퇴하면서 전투는 끝이 났습니다. 이후 1598년에 일본군이 조선을 떠나며, 임진왜란은 종결되었습니다.

              2023. 02. 2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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