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요전쟁은 어떠한 전쟁인가요?

2023. 02. 02. 21:55

역사관련 자료를 찾다가 여요전쟁을 알게 되었는데요.

여요전쟁은 어느나라와의 전쟁을 말 하는 것이며, 어떠한 이유 떄문에 일어난 전쟁인지 궁금합니다.


총 3개의 답변이 있어요.

가족**** 전문가 인증 뱃지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을 여요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이 전쟁은

993년(성종12년)~1019년(현종10년), 26년동안 세번에 걸쳐서 전쟁을 치렀다고 합니다.

원인은 고려의 고토 수복 이념과 북진에 대한 요나라의 예방전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처: 나무위키 '여요전쟁'

2023. 02. 02.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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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93년부터 1019년 까지 총 26년동안 3차례에 걸친 요나라의 고려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입니다.

    거란은 916년 나라를 세운지 10년만인 926년에 만주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던 발해를 공격해 무너뜨려 만주 지역을 장악 후 이어서 인접한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기위해 942년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후삼국 통일을 이룩하며 고려의 위치를 굳건히 한 태조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로 인식하여 그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모두 개성 만부교 아래에서 굶어죽게 만들었으니, 이 만부교 사건으로 고려와 거란의 외교는 단절되었고, 고려에서 태조 이래로 거란에 대한 적대노선을 계속 유지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때까지는 본격적인 전란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거란 입장에서는 중원에 자리하고 있던 송나라를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 후방의 안정을 도모해야 했고, 정안국 같은 발해 부흥 세력들도 거란을 상대로 저항하고 있어 그 후방에 있는 고려와의 관계가 중요했습니다.

    반면 고려는 당시 멸망한 발해의 잔존세력을 계속 흡수하여 국력을 키우고있어 그들 때문이라도 정치적 역학관계상 거란과 우호관계를 맺기 힘들었습니다.

    고려는 후에도 북진정책과 왕건의 훈요10조를 충실히 따라 거란을 배척하는 한편 송과의 친선을 도모하고 광종대인 960년 본격적으로 송나라와 통교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북장 두준 둥이던 거란에 대한 경략을 시도, 발해 유민들이 세운 국가인 정안국도 송나라와 화친하면서 거란에 대항합니다.

    이에 요나라는 국제적으로 고립될수 밖에 없었고 이를 타개하고자 986년 정안국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멸망시키고 만주 전체를 장악 후 고려에 송과 친교를 끊고 거란에 화친할 것을 요구해왔습니다.

    결국 993년 10월 요나라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는데 소손녕은 봉산에서 윤서안이 이끄는 고려군을 무너뜨리고 윤서안을 포로로 잡고 봉산을 점령합니다. 그 후 거란의 군사가 80만대군이라고 선전하며 빨리 항복하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요군의 침입에 고려는 매우 동요하고 신료들은 항복하자, 항복만 하면 받아주겠나, 땅도 같이 떼줘야지 의 의견으로 나뉩니다. 이때 서희만이 소손녕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고 할지론을 반대하여 이를 막았습니다. 이어진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이끄는 고려군이 소손녕의 요군을 격퇴하자 조정은 강화론으로 돌아서고 이때 소손녕이 다시 회담을 요구하자 서의는 단신으로 요나라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입니다.

    서희가 파견된것은 고려 내부에서 어차피 뺏길거, 서경 곡창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뿌리고 남은것은 태워버리라는 명령에 반발해 그 곡식으로 군대를 유지할수 있는데 버리면 안됩니다. 라고 하자 그럼 말 꺼낸 네가 가서 협상을 해봐라 하고 파견된 겁니다.

    회담은 처음부터 서희와 소손녕의 기싸움으로부터 시작되고 소손녕이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며 서희에게 절을 하라 요구하지만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지만,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한다는 소리는 못들었다며 되받아칩니다. 결국 소손녕이 한발 물러나 서로 맞절을 하고 동서로 마주 앉았습니다.

    이 회담으로 요군은 물러갔고, 고려는 지금의 평안북도 서쪽 일대인 강동6주를 얻게됩니다.

    이후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전연의 맹을 맺은 요나라는 기존 고려와의 관계도 재설정할 필요를 느끼고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고 요를 사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와 고려국왕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명분으로 하여 고려 현종시대에 2차 침략을 감행합니다.

    고려는 994년 북송과 국교를 끊으나 성종이 994년 6월 송나라에 고려는 진심으로 송을 따르고 있고 거란을 증오한다는 국서를 보냈으며, 성종이 승하한 후에도 목종이 997년 이부시랑 주인소를 송에 파견하여 고려가 중화를 사모하고 있으나 오랑캐 거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국서를 보내는 등 계속 북송에 비밀리에 사신을 보냅니다.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한 후 하공진은 강조에게 협력한 대가로 동료 유종과 함께 북방 양계에 주둔하게 되는데 1010년 봄, 조정의 명도 받지 않은 채 무단으로 동여진 부락을 공격했다 패전하고 당시 화주를 맡고있던 유종이 앙심을 품고 고려 조정에 조회하려 화주에 들어와있던 여진 추장과 그 수행원 95명을 모조리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일로 고려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된 여진은 거란에 강조의 정변을 알리며 대신 원한을 갚아줄 것을 호소하며 여진의 협력을 얻게 된 요성종은 자신감을 얻게됩니다.

    현종이 즉위하고 요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사실을 알린것을 비롯하여 몇차례의 사신을 파견하나 요 성종은 강조의정변을 구실로 고려 정벌의 군령을 내려 준비를 서두르고 사신을 파견하여 목종 시해의 이유를 정식으로 물었습니다.

    고려는 두 차례 사신을 파견하고 9월에는 거란의 수도인 동경의 유수에게도 특사를 보내나 거란은 강경했습니다.

    고려조정은 이에 대비하여 10월 실권자인 참지정사 강조를 행영도통사에 임명, 충정 부서를 정한 뒤 고려 전역에 있던 병력을 모아 30만대군을 꾸려 통주로 파견을 보내고 귀양보냈던 하공진과 유동도 복직시켜 거란군의 침입에 대비토록합니다. 총사령관이 된 강조는 통주에 진을 치고 주둔하며 거란군을 기다립니다.

    요 성종은 친히 보기 40만을 의군천병이라고 칭하며 거란군을 진두지휘하고, 실제 군세를 주도하는 도통에는 대송 전쟁에서 지휘했던 소배압을 임명, 이전 침공과는 다르게 사신을 보내어 미리 출병 사실을 통지합니다.

    거란군은 1010년 11월 진군로를 따라 내원성에서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까지 행군하는데 이곳은 강동 6주를 서희가 안정화 시킨 이후 주요 거점이 모두 요새화된 지역으로 흥화진은 11월 중순부터 일주일 이상 공략하고도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 진사 정성 등이 이끄는 방어군의 거센 저항으로 함락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통주에서는 강조군이 초전에서 거란군을 격퇴시키지만 강조가 탄기를 하며 방심한 사이 격파되고 이로 강조를 비롯한 부통사 이현운 등 많은 장수가 체포, 사살됩니다. 강조와 이현운도 거란의 포로가 되는데 이현운이 배신하고 거란을 섬긴다고 하자 강조는 그에게 욕을 하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죽었습니다.

    이 패배로 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군 주력은 소멸됩니다.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요 성종의 무척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하지만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전의 뜻을 굳히고 왕의 몽진을 전격 결정하나 왕을 버리고 간 신하들이 많았습니다.

    추격하는 무리들을 떨쳐낸 현종 일행이 창화현에 이르렀을때 고을 아전이 왕의 일행을 보고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냐며 묻고, 현종은 그런 무례함에 화가 났지만 모른척하자 현종의 태도에 화가 난 아전은 사람을 시켜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고 외치게 했습니다.

    이 말에 현종 일행은 겁을 먹고 김응인은 시랑 이정충, 낭장 국근 등과 달아나고 밤이 되어 다시 누구인지 알수없는 적이 공격하자 그나마 남아있던 신하들도 도망가버립니다.

    우여곡절 끝에 양주로 향한 지채문 일행은 달아났던 국근을 만나 합류하고 다시 하공진과 유종을 만납니다.

    지채문은 하공진이 이끌고 있던 병사 20여명을 데리고 양주로 돌아가 빼앗겼던 말과 안장을 되찾아 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거란군은 수도 개경을 함락,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고 이때 대량의 고서적, 사서 들이 붙라고 역대 고려 왕조 실록들도 소실되어 이를 복구하라고 현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7대 실록입니다.

    하공진은 스스로 요성종에게 화친을 설득하겠다고 말하고, 고영기와 함께 사신으로 북쪽으로 향했으며 현종은 남쪽으로 떠나는데 당시 현종 일행은 앞서 창화현에서 갓 벗어난 상태로 현종의 표문을 얻어 거란군쪽으로 향하던 하공진은 장화현 관아에 닿기도 전에 거란군 선봉과 조우합니다.

    1010년 12월 16일 양규가 흥화진으로부터 병사 700여 인을 거느리고 통주에 이르러 병사 1000인을 수습합니다.

    하공진은 거란군의 안내를 받아 성종을 만나고 고려의 남방은 수천리에 달하며 고려 왕은 이미 도주하였다고 거란 성종을 속입니다. 이미 퇴로가 위험하여 전세가 불리함을 안 성종은 이 말을 믿고 고려 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하공진을 인질로 잡아 퇴각합니다.

    2차 침입 후 고려는 계속해서 북송과 비밀리에 통교하고 1010년 북송에 사신을 보내 지원요청을 하나 북송은 고려가 오래도록 조공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냉담한 반응을 보입니다.

    고려는 대대적으로 전쟁준비에 들어가고 개경의 방비를 점검, 송악산에는 산성을 새로이 건설하며 중앙군을 확장합니다.

    그러다 1014년 영업전을 빼앗겨 분개한 중앙군인 경군과 관직 체제의 문제로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상장군 최질과 김훈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 정변은 현종이 서경 유수 이자림과 반란을 주도 후 고위 무신 19명을 잔치를 벌인다는 명목으로 불러 살해했으며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난을 처리한 1015년 고려는 북송에 지원요청을 하나 북송은 거부하고 결국 요성종은 이 기회를 노려 고려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결심합니다.

    거란은 현종 9년 소배압을 도통으로 소굴렬을 부통으로 삼아 10만대군을 이끌고 내침하고 고려에서는 평장사 강감찬으로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영주에 나아가 대기합니다.

    강감찬 등은 흥화진으로 나가 정예 기병 12000기를 뽑아 산곡 사이에 매복,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의 큰 내를 막고 거란군이 마음 놓고 건너가길 기다리다 수공을 가해 도하하는 거란군의 허리를 끊고 매복한 기병을 돌격시켜 거란군을 격파합니다.

    고려군 매복작언으로 타격을 입은 소배압은 기존의 거점을 무시하고 남진하여 개경을 위협합니다. 이에 고려세어는 개경의 방어에 진력을 하고 거란군이 무리하게 남하하여 개경으로 향하므로 고려군은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곳곳에 타격을 주었고 거듭된 패배에도 거란군이 계속 개경으로 오자 태조의 재궁을 북한산의 향림사로 옮기고 개경을 계엄합니다.

    현종 10년 정월 3일 소배압이 이끈 거란군이 개경에서 150리 정도 떨어진 신은현에 이르자 현종은 청야전술을 써 성 밖의 민호를 전부 성 안으로 들어오도록하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 후 도성의 방비를 엄하게 합니다.

    소배압은 더 이상 개경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함을 알고 퇴각하고 소배압이 탐색전 삼아 300명의 기병을 개경 주변 금교역으로 파견하자 현종은 100기를 보내 야간 기습으로 거란군 정찰대를 전멸시킵니다.

    1019년 2월 5일 고려의 국왕인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나가 강감찬을 맞이하였습니다.

    2023. 02. 02.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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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요 전쟁은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의미 합니다. 호칭의 문제로는 고려를 뜻하는 " 여 " Geryeo 그리고 거란의 국호인 " 요 "를 더해 만들어진 고려와 거란의 전쟁으로 993년부터 1019년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3차례에 걸친 요나라(거란)의 고려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의 결말은 끝까지 맹렬하게 저항한 고려의 대승으로 끝나며 거란은 중국과 몽골에 흡수되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2023. 02. 02.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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